강남학원에 보내면 샤론 최의 영어가 만들어질까?

봉준호 영화감독의 통역사인 최성재(샤론 최)씨가 강남의 P영어학원을 다닌 것으로 알려지면서 맹모들의 문의 전화가 쇄도하고 있다.

학부모들은 P학원에 '샤론 최가 어떤 수업을 수강했느냐?'고 문의하며 자신의 아이들을 제2의 샤론 최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각종 맘카페에서는 "아이를 샤론 최처럼 키우고 싶다"는 글이 쏟아지고 있다.

P학원 관계자는 13일 뉴스1과의 통화에서 "샤론 최는 중학교 시절 이 학원을 다녔다"며 "학원을 다녔다는게 알려지면서 문의 전화가 끊임없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후략)...


http://news1.kr/articles/?3841982


샤론 최가 뜨니까 그를 따라한답시고 강남 영어학원에 불티가 난다죠?
'한국적인, 너무나 한국적'인 현상에 헛웃음이 도집니다.
누가 두각을 나타냈다 하면 너도나도 뒤따라서 합류하는 '미투' 종족들의 대행진...

제 자식들의 앞날을 챙기려는 맹모들의 열정을 무작정 비웃고 싶진 않습니다만,
샤론 최가 어렸을 적 다녔던 강남 학원에 보내면 제2, 제3의 샤론 최가 될 거라는
저들의 맹목적이고도 단순한 사고엔 그저 한숨밖에 안 나옵니다.

아다시피 샤론 최는 재미교포가 아닙니다.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토종 한국인일 뿐이죠.
유학경험이라봤자 초딩 때 LA에서 2년, 고딩 졸업 후 USC에서 유학한 게 전부입니다.
별로 안 길죠? 그런데도 그의 영어는 원어민 뺨칠 정도로 매끄럽고 탁월합니다.

어느 기사를 보니까, 언제 영어가 많이 늘었느냐는 질문에
"초딩 때 2년 정도 LA 근교에 살았다. 비자 문제가 있어서 1년 정도 학교를 못 다녔는데,
대신 미국 친구들과 엄청 많이 놀았다. 그때 영어가 확 늘었던 것 같다"고 답했다더군요.

아마 이걸 보고서 또 어릴 때부터 미국 보내려는 부모들도 많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샤론 최의 개인적인 성장을 일반화.도식화해서 뭘 얻을 수 있을까요?
그래봤자 흥부의 '대박'을 작위적으로 따라하다 망한 놀부 꼴 밖에 더 되겠습니까?

나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샤론 최의 영어통역을 보면서 전율을 느낍니다.
어떻게 저 짧은 시간에 저렇게 맛깔나고도 생동감 넘치는 표현을 만들어낼 수 있나?
더욱, 원어민도 아니면서 어떻게 현지화된 영어를 저렇듯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나?


샤론 최의 통역 중에 대표적인 것 하나. 지난해 12월 NBC 토크쇼 ‘더 투나이트쇼’에서
진행자 지미 팰런이 기생충의 내용을 묻자 봉 감독이 "모르고 봐야 재밌다"고 답했는데
샤론 최가 그를 “the film is the best when you go into it cold”이라고 통역했드랬죠.

사실 "내용을 모르고"란 말에 즉각 떠오르는 말은 "without any information"입니다.
좀더 세련되게 표현하자면, "Going in blind"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샤론 최는 'cold'를 'warm up'의 반대말로 부사화하여 이를 해결했습니다.

이런 재치와 순발력을 영어학원에서 배울 수 있을까요?
이 뿐만이 아닙니다. 샤론 최의 통역에는 이처럼 원어민적인 감성만이 아니라
화자의 의도를 부각시키면서도 현지인을 배려하는 멋스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몇 개만 예를 들어 보죠.

1. "박스오피스에서도 되게 좋은 결과가 있고 사람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여줘서
그게 놀라우면서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요."



봉 감독의 말을 직역하면, "On the other hand, I was genuinely surprised,
but on the other hand, I wasn't surprised at all"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통역하면 듣는 이들에게 매우 혼란스러운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But I knew I could not fail"로도 통역 가능한데, 그러면 오만한 인상을 주게 되죠.
샤론 최는 이를 피하기 위해 "inevitable"(불가피한, 필연적인)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누가 잘해서가 아니라 정황상 잘 될 수밖에 없는 영화라는 뉘앙스를 전달한 거지요.

"I was very surprised, but at the same time I thought it was very...inevitable"

2. "어렸을 때 제가 항상 가슴에 새겼던 말이 있었는데"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봉 감독이 마틴 스콜세지 면전에서 자신에게 영감을 주었던
그의 명언 - "The most personal is the most creative" - 을 되새기며 한 말입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았던 지극히 감동적인 장면이자 시상식의 하이라이트였죠.

일반적으로 'hold dear to one's heart'(가슴에 소중히 품다)를 사용해서
"There was a saying that I held dearly to my heart..."라고 번역해도 무난할 겁니다.
그러나 샤론 최는 여기에 '조각하다, 새기다'는 뜻의 'carved into'를 활용했습니다.

"There was a saying that I carved deep into my heart..."

요컨대, 스콜세지의 명언을 단지 '가슴에 소중히 간직했다'는 그 정도가 아니라
'그의 가르침을 뼈 속에 깊이 새겨서' 그 덕분에 오늘날 이렇게 성공한 감독이 됐다는,
봉 감독의 심정을 가장 적절하고도 임팩트있게 전달한 통역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3. "저의 영화를 아직 미국의 관객들이나 사람들이 모를 때..."


봉 감독이 마틴 스콜세지에 이어 퀜틴 타란티노에게 감사를 표할 때 한 말입니다.
직역해서 "don't know my movies..."라고 해도 얼마든지 뜻은 통합니다.
그러나 샤론 최는 'know' 동사 대신 'be familiar with'를 사용했습니다.

"When people in the U.S were not familiar with my films..."

"not familiar with"는 "익숙하지 않다" "생소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상대의 무지를 건드리는 "don't know"란 표현 대신 보다 상황적으로 접근하는
샤론 최의 지혜와 겸손이 돋보이는 통역이지요.

4. "Foreign Language에서 International 카테고리로 바뀌었는데..."


봉 감독이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을 받는 자리에서 한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The name of the category has changed..."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샤론 최가 선택한 단어는 'has a new name now' 였습니다.

"The category has a new name now..."

'has a new name now'은 'has changed'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간 통역입니다.
아카데미 측의 변화의 결과로 '인터내셔널'이란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니까요.
상의 이름의 변화를 훨씬 더 정확하게 & 원어민스러운 감성으로 풀어낸 통역이지요.

5. "제 대사를 멋지게 화면으로 옮겨준..."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봉 감독이 그 공로를 배우들에게 돌리면서 한 말입니다.
한 마디로, 배우들의 리얼한 연기 덕분에 자신이 쓴 대사가 생명력을 얻게 됐다는 거지요.
샤론 최는 이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bring this film to life'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for bring this film to life. Thank you"

만약 이것을 문자적으로 'transfer'(옮기다)란 동사를 사용해서 통역했다면
그야말로 죽은 영어가 되고 말았을 겁니다(transfer...to the screen.)
찰나의 시간에 봉 감독의 의도를 정확히 캐치해내는 능력이 실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예를 들자면 얼마든지 계속 할 수 있습니다만,
손가락도 아프고 시간도 많이 걸려서 이쯤에서 멈추기로 하겠습니다.
영어가 내 전공도 아니고 말이죠.

각설하고, 내가 상기한 예시들을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건 이겁니다.

샤론 최가 중딩 시절에 잠깐 다녔던 강남 영어학원에 등록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샤론 최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
샤론 최의 영어에는 학원에서 제공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

그러면 샤론 최의 통역을 특별하게 만드는 '그 무엇'은 무엇일까요?

3가지로 답하자면, 첫째) 원어민 뺨치는 최고 수준의 영어,
둘째)자신의 전문분야인 영화를 소재로 삼을 수 있었다는 점,
셋째)미국 문화에 대해 현지인들 못지 않은 심층적인 이해를 들 수 있겠습니다..

요컨대, 샤론 최의 통역이 돋보인 데에는 이 3가지가 삼위일체처럼 결합됐기 때문입니다.
언어와 전공분야, 그리고 문화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게 하나로 녹아든 거지요.
연즉, 누구 따라한다고 부화뇌동 하는 대신 자신의 길을 찾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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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이 -


by 어른이 | 2020/02/19 10:50 | 문한별 칼럼(2020) | 트랙백 | 핑백(1)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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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타마 at 2020/02/19 11:50
인형놀이하는 극성맘들이 아직도 많나보네요.
누구 인형이 더 멋진지 경쟁하는 게 참 재미있기는 하죠.
하도 가지고 놀아서 너덜너덜해진 인형에게
"난 너에게 해줄 건 다 해줬는데, 넌 왜 최고의 인형이 아니니?" 까지 하면 완벽!
Commented by 어른이 at 2020/02/19 19:21
'인형놀이'라는 말이 와 닿네요. 가슴도 아프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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