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상에 환하게 웃은 한국과 곤혹스런 일본

일본 태생의 메이크업 아티스트 츠지 카즈히로가 오스카상 분장상을 수상하자 들뜬 일본. 그 사실을 축하하고 대대적으로 띄우기 위해 일본 취재진이 총출동하다시피 했드랬죠. 그를 만난 자리에서 "일본에 관해 한 말씀 해달라"고 요청하자, 카즈히로 왈 ;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미국인입니다. 이런 말은 실례지만 나는 일본 문화가 싫어져서 미국에 왔습니다. 일본에서는 꿈을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그 말에 카즈히로의 입만 바라보고 있던 일본 취재진은 멘붕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좋은 날, 좋은 자리에서 정색하고 일본의 현실을 까는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한 거죠. 더 곤혹스러운 것은 일본 현실을 꼬집은 카즈히로의 말을 반박할 말이 마땅치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일본의 많은 네티즌들이 카즈히로의 말에 공감하는 SNS 댓글을 단 것도 그 때문이고요.

"우수한 인재들이 정당하게 평가 받지 못하는 나라. 정말 재능을 갖고 노력하는 사람은 일본이 우수한 사람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hoh****), "일본인이지만 바로 생각나는 건 부정적인 일밖에 없다. 입맛에 맞을 때만 일본을 전면에 내세우지 말자"(1bw***), "일본은 인정받기까지 왠지 시간이 걸리고 알 수 없는 세력이 방해한다"(epx***), "일본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게 어렵다. 세계관이 일본 중심이다"(tz1***)... 등등.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2002111131086691

카즈히로의 말이 아니라도, 일본 영화계가 지극히 보수적이어서 개인의 창의성을 발휘하기가 매우 어럽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상하관계가 엄격한 위계질서에다 일본 현실을 비판하는 영화는 꿈도 못 꿀 정도로 꽉 막혀 있고, 특히 아베 정권 들어서 정부 눈치 보는 이런 예속현상이 더 심해진 것도 한 이유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있습니다. 지난 해 일본에서 이례적인 영화 한 편이 만들어졌습니다. 아베 내각을 정조준한 '신문기자'란 영화가 그것인데요. 문제는 이 영화가 아베의 사학비리를 비롯해 각종 문제를 건드리는 내용이었다는 겁니다. 때문에 모든 일본 배우들이 출연을 꺼리고 기피해서 하는 수 없이 한국의 심은경이 주인공 역할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하나 더. '기생충'에 앞서 칸 황금종려상을 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이 일본 내에서도 냉대를 받은 것을 다들 아실 겁니다. 아베 총리가 의례적인 축하의 말 한 마디조차 안 했을 정도.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아베 정부가 통치하는 일본의 현실을 우울하고 음울하게 그렸다는 거지요. 해서 '일본의 수치' '일본의 망신'이라는 극렬한 비난도 적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처럼 획일화 되고 박제된 분위기 속에서 카즈히로가 맘 놓고 자신의 일에 몰두할 수 있었을까요? 일본 뿐만 아닙니다. 정부 비판적인 영화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검열이 일상화된 나라 중국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죠. 우리나라라고 뭐 다르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칸과 아카데미를 석권했다 하여 기뻐하고 있지만 그러나 시선을 뒤로 돌려서 만약 박근혜 정권의 연장선이었다면 이런 영화는 결단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겁니다. 더구나 봉준호 감독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감시받던 사람이었음에랴.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위대한 감독과 제작진도 필요하지만 그 전에 창작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 자유로운 환경과 분위기가 선행돼야 합니다. 거리낌 없이 상상할 수 있고 마음 먹은 대로 영화로 풀어낼 수 있는 열린 사회... 국민의 정부 등장과 더불어 봉준호 박찬욱 이창동 홍상수 등 신진세력들이 대거 출현하고 문재인 정부 하에서 찬란하게 꽃을 피운 것도 아마 이런 사회적 요인과 무관치 않을 겁니다. 워싱턴포스트가 "기생충은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였고요.

그 점에서 '기생충'에 쏟아진 세계의 상찬을 우리 모두는 다같이 축하하고 기뻐할 자격이 있습니다. 적어도 촛불혁명 이후의 대한민국은 이런 창의적인 영화가 만들어지고 나올 수 있는 자유로운 나라,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예리하게 도려냈음에도 대다수 국민은 이를 색깔론으로 치부하지 않고 - 계급투쟁을 선동하는 좌파.빨갱이영화라는 자한당과 일베 등의 일부의 병적인 반응은 제외하고 - 영화적 성취로 이해하고 바라보는 수준 높은 나라라는 것을 세계에 증명한 셈이니까요. 이만하면 '기생충'의 성공을 충분히 자랑스러워 해도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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