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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랏말싸미'의 신미 창제설을 반박함 / id_743872914 님
1443년 세종 25년 훈민정음 : 내가 스물여덟 글자를 새로 만드나니... 이달(1443년12월) "임금이 직접 언문28자를 만들었다. 글자는 간단하고 쉬우나 변화가 무궁하다 이를 훈민정음이라 이른다." 명예직이자 겸직가능한 대제학과 달리 실무책임자인 부제학인 최만리는 언문을 굳이 만들어야 했는지에 대해 항의하였습니다. 현재 일부에선 세종이 토론의 달인이라는 이미지, 여러 업적 등으로 인해 온화하고 학문적 열정이 높았던 분 정도로 생각하다 보니 왠지 약한 느낌을 받는 것 같은데 세종대왕의 왕권은 강했습니다. 결코 왕이 신하들에게 휘둘리던 시절이 아닙니다. 그래서 일부 따지는 신하들은 벌을 주기도 했습니다. 며칠 있다 풀어주긴 했지만 개중 강하게 항의한 자는 직을 폐하기도 했습니다. 명분 없이 마구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 신숙주 신숙주의 문집인 보한채집에는, "왕이 28자를 만들고 언문이라 했다. 궁중에 기관을 설치하고 문신을 선발해 책을 편찬케 했는데 공이 혼자 내전을 드나들었다." 즉, 집현전 설의 주역이자 5개 국어에 능통했다는 신숙주의 기록에 의하면, 왕의 명을 받아 한글 서적을 편찬했다는 말이 됩니다. 신숙주가 황찬을 만나 자료를 수집했다는 설은 반박된 지 오래지만 아직도 그런 말이 종종 보이는데 신숙주는 황찬에게 한글에 대해서가 아닌 한자음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을 질문하러 갔습니다. 이 때 이미 한글은 창제 되어 있었으며, 요동에 갔을 이 때는 1447년 1월입니다. 이후 한글이 반포 되고 3년간 집현전 학자들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만드는데 동원되었습니다. 세종은 농업, 천문, 의학, 각종 과학 기술에 대한 견문과 조예가 깊었으며 이를 장려하였습니다. 각 학문 분야의 전문서적을 수백권을 만들어낸 시기에 집권한 군주였습니다. 세종대왕 시기가 우리 역사에서 가장 과학분야와 문화가 발달하였으며, 아는 만큼 보인다고 신하들에게 지시만 한 것이 아니라 세종대왕 본인께서 높은 성취를 이룬 분이었습니다. 또한 뚜렷한 성과를 보인 문헌들에는 담당 실무자의 이름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는데, 한글만은 세종이 직접 창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례본에는 "전하가 지으셨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정인지는 서문에 "전하창제'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대부들의 당시 생각은 한글창제가 대단한 공이 아니라 안 해야 되는 행위를 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결정적 공헌을 한 신미를 숨겨야 하는 이유라고 보는 것은 타당치 않습니다. 오히려 영화처럼 신미가 주도했다면 차라리 신하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문집 등을 통해 세종이 사대의 명분을 해친 군주로 기록되기 보다는 신미가 주도했다고 적는 것을 원한 사람이 있을 법한 상황인데, 아래 적는 여러 기록 모두에서 그런 흔적 보다는 세종이 친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들을 두루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세종대왕에게 공을 돌리기 위해 신미를 숨겼다는 생각은 매우 부적절하다는 이야깁니다.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 언어학의 대가 세종 세종대왕께서 "너희가 설총(이두)은 옳다고 하면서 제 군주가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라고 최만리의 상소에 대해 되물으셨는데, 이것은 세종 본인이 친제하셨음을 드러내는 부분입니다. 왕자 시절부터 학문적 성취가 상당하였고 재위 기간에는 토론에 있어서 대적할 자가 없었으며, 학문으로 대왕이라 불릴 만한 분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세종실록, 훈민정은 해례본 등에 적혀 있는 문구를 폄하하고 훼손하면서 자의적 해석을 하려 합니다. 친제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면서 그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라는 범인의 사고로 재단하려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놓지 아니하였다는 기록 역시 대충 넘어가 버리지만 세종의 이 엄청난 집념은 거의 모든 기록에 공통적으로 드러납니다. 경서류에서 안 본 책이 없다 하니 가히 왕이라는 타이틀을 빼고 봐도 학문에서 겨룰 자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에 대해 반발하는 신하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 칠음과 자모가 몇이냐?" 자주 언급되는 최만리는 집현전 부제학이었고, 세종의 말 몇마디를 반박하지 못해 한 마디로 대꾸를 하지 못 할 지경이었습니다. 즉, 세종은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는 말입니다. 영화 '나랏말싸미'에서는 세종이 조력자 쯤으로 묘사됩니다. 사실상 신미가 다 한 것처럼. 신미가 거의 다하고 세종은 좀 더 단순하게 만들면 좋겠다는 일부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선에서 그칩니다. ### 동국정운 방대한 분량의 중국 음을 모두 한글로 옴겨 적은 것이 동국정운인데 신숙주의 서문에 따르면 음 하나하나까지 모두 임금의 재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즉, 세종대왕께서 직접 친히 검토하고 재가를 해줘야 완성이 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언어학의 대가가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집현전은 왕의 명령에 따라 한글 스물여덟 글자의 원리와 용례를 풀어서 해석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동국정운은 그 중 하나입니다. ### 정의공주 정의공주 집안의 족보에 남은 기록에는 한글의 변은과 토착을 풀 것을 여러 대군에게 명하였으나 대군들이 풀지 못한 것을 정의공주가 풀어내 아비에게 칭찬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곧 차기 군주가 되는 문종을 비롯해 대군들과 공주들이 모두 참여해 왔음을 알 수 있고, 세종대왕 본인이 확고하게 주도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즉, 세종 대왕 본인이 원리와 28자를 직접 창제하시고 이것을 활용하는 등의 부차적인 부분에 대해 왕자와 공주등의 조력을 받다가 창제를 마친 후에는 집현전 학자들에게 해례본을 만들도록 한 것입니다. # 운회번역 고금운회거요(운회)를 번역하는 사업이 창제 후 3개월 뒤 시작되는데 이때 세자와 여러 대군이 그 일을 감독하였습니다. 위에 언급한 내용과 연결짓는다면 아무 무리가 없는 내용입니다. 이미 반포 전부터 참여해 온 대군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당시에 세종대왕 본인과 그 일부를 제외하고는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대부가 없거나 있다 해도 소수에 불과 했으므로 왜곡하여 기록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이것이 정사이고, 이렇게 여러 가지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모든 것이 세종대왕 본인의 창제로 귀결됩니다. # 성삼문 성삼문은 직해동자습에서 한글을 만든 것은 세종과 문종이라 적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하의 입장에서 본 시각이므로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증거라 볼 순 없습니다. 다만, 신뢰할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이러한 근거가 확실한 자료들을 다수 살펴보면 세종께서 손수 창제하였음은 명백하며 문종의 기여도는 확실치 않으나 다른 대군들에 비해서는 보다 높은 것이 확실하며, 때로 정의공주가 특별한 역할을 한 때가 있었다 정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즉, 세종대왕은 가족의 협조 하에 십여 년을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 내었습니다. # 옛 문자 주지하다시피 세종대왕은 본인이 언어 및 학문의 대가였습니다. 기록에 "옛 문자"를 본따 만들었다는 것을 두고 가림토니. 이번의 신미 설처럼 범어니 하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즉 홀로 만들 수 없을 것이라는 전제와 옛 글자란 대목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많은 증거들을 모두 외면하고 엉뚱한 해석을 자꾸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 "동방에 옛부터 속용문자가 있는데 그 수는 갖추어져 있지 않고 그 꼴은 법이 없어..."(훈민정음 운해, 신경준) -- 가림토 문자의 탁본이라 주장했던 것이 알고 보니 돌궐의 소리문자였다. 이 또한 동북방의 기마문화에 퍼져 있던 소리문자의 원형에서 차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북아시아에 소리문자의 흔적들이 있음을 알수 있는 자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확실함이 아닌 추정의 근거 정도입니다. 신미의 범어 역시 이 여러 설의 하나 정도에 불과합니다. 친제의 정론 근처도 못가는... 가장 유력한 것은 여러 언어들을 두루 섭렵하여 독자적으로 융회관통하여 글자를 발명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결론은 세종대왕의 친제인데, 그 과정 또한 세종대왕 스스로가 언어의 대가였기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안 본 책이 없고 후기에 불교에 관심을 두셨던 것을 거꾸로 해석하여 신미의 영향을 받았고 깊은 가르침을 받은 때문에 한글을 창제할 수 있었다 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 할 것입니다. 모든 기록이 가리키는 것은 외면하고, 불분명한 끼워맞추기를 들이대는 것은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비상식적이라 보아도 무방합니다. '나랏말싸미' 영화에서 신미에게 의견을 내거나 명령을 하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가 신미를 넘어서는 당대 최고의 학문적 성취를 이룬 분이었습니다. 차라리 신미가 범어를 비롯해 다수의 언어에 능통했다는 말보다 신숙주나 성삼문의 학문적 성취가 더욱 신뢰할 만 하다 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둘조차 세종의 업적에 해설서를 만들어 내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신미가 껴들 틈이 없었다는 이야깁니다. 필요하지도 않고요. ![]() '조선왕조실록' 문종 피셜 / id_lys0111 님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문종 피셜로 신미는 한글 창제에 기여할 수가 없습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004006_002#footnote_view1 임금이 영의정(領議政) 하연(河演)·좌의정(左議政) 황보인(皇甫仁)·우의정(右議政) 남지(南智)·좌찬성(左贊成) 박종우(朴從愚)·우찬성(右贊成) 김종서(金宗瑞)·좌참찬(左參贊) 정분(鄭苯)·우참찬(右參贊) 정갑손(鄭甲孫)을 불러 도승지(都承旨) 이사철(李思哲)에게 명령하여 의논하게 하기를, "대행왕(大行王)께서 병인년220) 부터 비로소 신미(信眉)의 이름을 들으셨었는데, 금년에는 효령 대군(孝寧大君)의 사제(私第)로 옮겨 거처하여 정근(精勤)221) 하실 때에 불러 보시고 우대(優待)하신 것은 경(卿)들이 아는 바이다...(후략)..." 대행왕 = 돌아가신 왕 = 세종 병인년 = 1446년 금년 = 1450년 훈민정음 창제 = 1443년, 훈민정음 반포 = 1446년 정리하면, 훈민정음은 1443년 창제, 1446년 반포인데, 문종 피셜로 세종이 신미의 이름을 들은 게 1446년, 만난 게 1450년입니다. 세종이 이름도 못 들어 본 신미가 한글 창제에 영향을 줄 수가 없죠. 그 후에 불경 언해 작업에 도움을 줬다면 몰라도요. ![]() '신미 한글창제설'의 전개과정 (with 불교계) / id_getbusy227 님 1. 해례본 발견 이전- 불교계와 학계의 소수설로 채택 2. 해례본 발견 이후- 학계에서 거의 사라짐 3. 신미의 '원각선종석보'를 토대로한 불교계의 주장 등장 : 조계종 집회나 불교계 방송에서도 호국불교 관련 주장 - 2011년 [한국불교사-조계종사를 중심으로] : 조계종 포교원에서 발간한 책으로 한글 창제 불교 영향설과 신미 창제설 주장. - 2014년 조계종 정각원 토요 법회 :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 대사' (https://youtu.be/f7ahP0vymNg) 4. 2016년 '원각선종석보' 완전한 위작 판명 #. 뉴시스의 정리 기사 : (https://n.news.naver.com/article/003/0007204558) 5. 이후 신미 창제설 사라짐 6. 영화 '나랏말싸미'로 다시 등장 : 불교계 방송에서 다시 주목하고 언급 시작 7. 불교계 뉴스와 최근 유튜브를 통해 신미 창제설 주장 - BBS 불교방송 : 역사가 지워버린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스님 https://youtu.be/3PTBkZ11Re4 - BBS 불교방송 : [인문학강좌] 신미 스님과 한글 창제의 비밀 https://youtu.be/rzxtZX6vArA 존재하는 가설이나 상상력을 이용한 픽션과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 내용을 주장하는 왜곡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영화가 어린 친구들이나 한국에 대해 공부하게될 외국 친구들에게 영향을 줄텐데 감독이 허구가 아닌 사실인 듯 언급했다고 하니 걱정이네요. ![]()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한글을 이 영화는 논란거리로, 그리고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네요. 아무리 영화가 상상력에 기반한 픽션이라지만 '나랏말싸미'는 그 선을 넘어 역사왜곡에 가깝게 여겨집니다. '신미 한글창제설'이 비롯된 '원각선종석보'가 위작임이 이미 드러났고 해례본에서도 명백하게 세종대왕이 혼자서 창제했다고 밝히고 있음에도 조철현 감독은 이 모든 사실을 부정하고 확인되지 않은 몇몇 가설에만 입각해 무리한 주장을 펼치고 있어요. ![]() ...(전략)...지난 7월16일 배우 송강호와 박해일과 함께 영화 ‘나랏말싸미’ 언론시사회에서 선 조철현 감독은 “신미스님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해인사 앞 대장경 테마파크의 ‘대장경 로드’와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의 <한글의 발명>을 통해 신미스님의 한글 창제를 확신할 수 있었다”면서 “‘다양한 훈민정음 창제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자막을 넣었지만 나로서는 넣고 싶지 않은 자막”이라고 말했다...(후략)...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835 감독은 대체 무엇을 노리고 '나랏말싸미'를 만든 걸까요? 마치 일본인이 한글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면 이렇게 만들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분노를 넘어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이 영화에 벌써부터 많은 이들이 불매운동을 펼치고 있다더군요. 그 불매운동에 적극 동감.공감합니다. 국민에게 공감과 감동 대신 분노만 자아내게 하는 이딴 영화는 막을 내려야죠. 개인적으로 송강호가 이런 영화에 출연했다는 게 너무나 속상합니다. '나랏말싸미'는 송강호 필모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흑역사로 남겠네요. ☞ 관련글 : 나랏말싸미, "개가 절하는 거 보셨습니까?" - 어른이 -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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