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조선일보 '소말리아 파병' 사설의 감동
조선일보를 가리켜 미국에 환장한 '친미신문' 혹은 '미친(美親) 신문'이라고 합니다. 일견 맞는 말입니다. 조선일보는 강한 상대만 만나면 정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상성욕의 소유자입니다. 대동아전쟁 시절 '내선일체'를 내세워 일본에 갈진충성(竭盡忠誠)한 조선일보가 지금은 '한미공조'란 명분 하에 '팍스 아메리카나'를 위해 숙야분려(夙夜奮勵)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살펴보면 아시겠지만, 미국이라 해서 조선일보가 무조건 춘심(春心)을 품는 건 아닙니다. 조선일보의 마음은 미국의 정파 중에서도 강경보수론자들이 많은 공화당 쪽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이것 저것 눈치보는 게 많은 민주당 쪽엔 상대적으로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입니다. 조선일보가 지난 2000년 미 대선을 보도하면서 민주당의 엘 고어를 갈구고 부시를 편애한 게 괜히 그런 것이겠습니까?   

조선일보는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전범입니다. 똑같은 논리를 갖고 한쪽에는 '코걸이'라 강변하고, 다른쪽에는 '귀걸이'라고 둘러대는 간교한 신문지입니다. 조선일보의 주장은 상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 변신하는 모양을 보자면, 마치 주변환경에 자연스레 반응하는 카멜레온처럼 거침이 없습니다. 자, 상대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 조선일보의 둔갑술을 한번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아니, 조선일보가 이런 말도 했나?

요즘 이라크 전투병 파병 문제로 나라가 요동치고 있으니만큼 그 건을 가지고 예를 들어 보죠. 지금부터 우리가 같이 읽어 볼 글은 1993년 10월 14일에 작성된 조선일보 사설 <전투부대까지야…>입니다. 제목부터 뭔가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대략 10년의 시차가 나는데, 미 공화당의 부시 정부에게 이라크 전투병 파병을 요청(?)받고 있는 작금의 대한민국 상황을 연상하시면서 읽으면 더욱 재밌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클린턴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소말리아 파병을 늘려달라는 친서를 받았다고 보도된 가운데 정부는 상록수 부대의 안전과 자체경비 강화를 위해 무장 장갑차 5대를 긴급 지원키로 했다고 한다. 우리 장병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그것이 과연 우리 정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아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소말리아 파병과 관련해서는 우리 정부도 지난 7월 30일 상록수 부대의 본대가 떠나기 오래전부터 현지의 정세 변화와 대응책을 다각적으로 검토해 왔을 것이다. 그에 따른 정부의 의도가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다가 미국이 증파요청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갑차를 파견키로 결정한 것은 두 가지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기에 충분하다.

소말리아에 전투병력을 포함하는 병력 증파문제는 정부가 비밀리에 강구할 사항이 아니다. 그동안 정부가 추적 검토해온 정세를 공개해서 국민적 토론에 물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친서 내용도 밝히는 것이 도리다. 그 내용이 정부가 판단하기에도 너무 무리한 것이라면 그렇다는 뜻을 전하면 되고, 선뜻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면 국민의 여론에 따라 결정함으로써 정부의 입장을 가볍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소말리아 파병은 그 나라의 평화스런 질서 회복과 난민구제 사업을 지원하는 데 기본 취지가 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세계 33개국이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의 깃발 아래 이에 참여하고 있다. 그 선한 취지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소말리아 국민 감정, 아프리카 민족주의의 표적이 된다면 정책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전투병 파견은 훗날 헤어나기 어려운 상황 자초할지도"

따라서 정부는 차제에 소말리아 지원문제를 진지하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우방인 미국으로부터 강력한 요청이 있다 해도 세계의 경찰역을 담당하고 있는 미국과 단지 인도주의 차원에서 참여하고 있는 우리의 입장은 다르다. 극히 제한된 평화활동을 수행하고 있는 우리가 분명한 전망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전투병력까지 파견하여 깊이 개입하는 것은 훗날 헤어나기 어려운 상황을 자초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소말리아로부터 이렇다 할 이익을 추구할 것도 없다. 지리상으로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인 인연이 깊은 것도 아니며, 냉전시대의 명분으로 곧잘 동원되었던 이데올로기상의 동류성조차도 없다. 그러므로 소말리아에 대해서는 아무런 부담없이 대할 수 있다. 우리 스스로의 냉철한 판단이 요구된다."
 

어떻습니까? 한 마디로 기가 탁 막히죠? 조선일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게 우선 신통 방통 꼬부랑통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지구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이 소말리아 전투병 파병을 요청해 왔는데도 감히!!! "정부가 판단하기에 너무 무리한 것이면 그렇다는 뜻을 전하면 되고, 선뜻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면 국민의 여론에 따라 결정"하랍니다. 결국 'No'하란 소리 아닙니까? 더구나 '국민 여론'에 따르라니요?   

그러다가 "자칫하면 국가적 결정이 여론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포퓰리즘적 상황"에 빠지면 어떡하구요? 그것은 또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국정을 운영한다는 대의 민주주의의 근본 취지에도 맞지 않는 일"이라면서요? 하여 대통령은 "여론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여론을 이끌어 가야" 하고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이라크 파병 문제에서 중심을 잡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노무현 대통령은 엊그제 이라크 추가 파병 문제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우리 국민적 인식"이라고 말했다. 이 문제에서 노 대통령이 '국민 여론'을 얼마나 크게 의식하고 있는가를 보여준 것이다. 국가적 현안에서 여론이 중요 변수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국가의 진로와 운명이 걸린 중대 사안을 결정하는 첫 번째 기준이 국민여론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  

자칫하면 국가적 결정이 여론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포퓰리즘적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국정을 운영한다는 대의(代議) 민주주의의 근본 취지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대통령은 여론의 흐름을 읽되, 거기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여론을 이끌어 가야 한다. 노 대통령은, 지금 우리에게 닥친 이라크 파병 문제에서 중심을 잡고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사람은 바로 대통령 자신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조선 사설, <대통령이 파병 문제 리더십 발휘해야>, 2003.9.19)
  

전투병 파병의 기본취지가 소말리아의 평화회복과 난민구제에 목적이 있다 할 지라도 "그 선한 취지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소말리아 국민 감정, 아프리카 민족주의의 표적이 된다면 정책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말도 웃깁니다. 왜 이라크 전투병 파병과 관련해서는 이런 말이 안 나오는 것일까요? 한국군의 이라크파병 자체가 우리의 선한 취지와 상관없이 그쪽 사람들에게 미국의 침략전쟁에 동조 내지는 가담하는 것으로 비춰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한 데 말입니다. 설마 조선일보는 이라크 민중들이 한국군 전투부대를 열렬히 환영할 거라고 그리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파병의 진정한 명분과 이유는, 이 정부가 지난 10월 파병을 결정하면서 밝혔던 것처럼 이라크의 조속한 평화 정착과 전후재건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 정부 역시 기회 있을 때마다 '파병은 이라크 평화와 재건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해 왔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고려 대상이 한국의 최대 동맹국인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임으로써 일방적 수혜의 차원에 머물렀던 한·미관계를 상호적 관계로 발전시키고 북핵 문제 등에서 공조를 더욱 원활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6·25 전쟁의 폐허를 딛고 재건에 성공했던 한국의 대통령이 파병 문제를 놓고 '경제적 실익이 없다' 운운하는 것은 계산만 앞세운 듯해 듣기에도 민망하다...."(조선 사설, <이러려면 왜 파병한다는 건가>, 2003.12.5)  

나아가 소말리아와는 지리상으로도 멀고 역사적 인연도 깊지 않고 이데올로기의 동류성조차도 없는 고로, 미국의 전쟁에 굳이 깊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또 어떻습니까? 이 말은 이라크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말 아닙니까? 도대체 이라크가 지리상으로 우리와 가깝기를 합니까? 아니면 역사적으로 인연이 깊기를 합니까? 그렇다고 같은 색깔의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지도 않잖아요?    

93년 소말리아 파병과 2004년 이라크 파병의 차이는?

조선일보 말마따나 우리는 '세계 경찰'을 자임하는 미국과 엄연히 입장이 다릅니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입만 열면 무작정 애오라지 자나깨나 불철주야 한결같이 "파병, 파병, 파병" 타령만 하고 있으니 이를 어이 이해해야 하는 겁니까? 소말리아를 상대해선 '냉철'하기 그지없던 조선일보의 판단력이 이라크의 열사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10년 만에 덜컥 '고장'나고 만 것일까요?

이 모양 하나 하나 모순점을 지적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제가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영민하신 독자들께서는 소말리아 전투병 파병 때와 이라크 전투병 파병 때의 조선일보 목소리가 현격히 다르고, 같은 미국이라도 클린턴 정부와 부시 정부에 대한 조선일보의 대응이 180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파악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하여 말씀드리건대, 조선일보야말로 정말로 재밌는 아니 웃기는 아니 막나가는 '대한민국 일등 찌라시'라 할 만 하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큰 일입니다. 겉으로는 조선일보와 싸우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조선일보 주문대로 따라가는 심약무비(心弱無比)한 노무현 대통령이 기어코 이라크 전투병 파병을 감행하려는 듯 해서 말입니다. 혹 노 대통령이 상기한 사설(소말리아 관련)을 읽으면 만의 하나 생각이 달라질까요?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골백번 신문고를 울려서라도 조선일보 사설을 들려 드리련만. 오호, 애재라.    

노무현 대통령에게 권하고 싶은 '조선일보 소말리아 사설'

끝으로, 이라크 전투병 파병을 강력 촉구한 조선일보 사설 목록을 올려 드릴테니 심심풀이 땅콩삼아 훑어 보시기 바랍니다. 조선일보가 이라크 전투병 파병에 얼마나 목매는지, 그리고 조선일보가 미 공화당 부시 정권을 위해 얼마나 충성을 다하는지 이를 보면 금세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일보 만세∼! 노무현 만세∼! 부시 만세∼! 

- [사설] 파병 논의, 대통령이 중심 잡아야(2003.09.14)
- [사설] 예상보다 부담 큰 미국의 파병 요구(2003.09.16)
- [사설] 대통령이 파병 문제 리더십 발휘해야(2003.09.19)
- [사설] 건군 55년·한미동맹 50년, 이라크 파병(2003.10.02)
- [사설] 정부조사단이 파병논란 더 키워서야(2003.10.08)
- [사설] 파병, 국익 확대로 연결시킬 전략을(2003.10.20)
- [사설] 한·미 동맹, 새 출발의 발판을 마련하라(2003.10.21)
- [사설] 파병 논란에 여당은 어디 있는가(2003.10.22)
- [사설] 시민운동은 청와대 밖에서 하라(2003.10.23)
- [사설] 파병 혼란, 위·아래가 따로 노는 정부(2003.10.29)
- [사설] 왜 NSC가 갈등과 혼선 만들어내나(2003.11.01)
- [사설] 젊은 병사는 장기판의 말이 아니다(2003.11.03)
- [사설] 파병 난맥 언제까지 방치할 건가(2003.11.08)
- [사설] 심상치 않은 한·미의 파병 입장차(2003.11.11)
- [사설] 노 대통령 파병 입장은 무엇인가(2003.11.13)
- [사설] 파병, 정부 결정 국익 다치지 않나(2003.11.15)
- [사설] 안보협의회 이후의 한·미관계(2003.11.18)
- [사설] 알 카에다 테러 위협 남의 일인가(2003.11.19)
- [사설] 파병은 결국 대통령의 결단이다(2003.12.01)
- [사설] 테러, 단호한 대응과 만반의 대비를(2003.12.02)
- [사설] 이러려면 왜 파병한다는 건가(2003.12.05)
- [사설] 후세인 체포 이후의 이라크(2003.12.15)
- [사설] 이라크 파병 철저한 준비 갖추라(2003.12.18)
- [사설] 청와대가 외교관 사담(私談)까지 엿듣나(2004.01.13)
- [사설] FTA와 파병안, 더 미룰 수 없다(2004.02.09)
- [사설] 정권과 국회가 합작해 나라를 무너뜨리는가(2004.02.11)
- [사설] 한나라당에 더 절망한다(2004.02.12)
- [사설] 이라크 파병부대, 안전 대비 충분한가(2004.02.25)
- [사설] 나라를 생각해야 한다(2004.03.13)
- [사설] 남의 일 같지 않은 알카에다의 스페인 테러(2004.03.16)
- [사설] 파병 안하느니만 못한 사태 돼서야(2004.03.20)
- [사설] 갈수록 이상해지는 이라크 파병(2004.04.03)
- [사설] 급변하는 이라크 정정(政情), 예의주시를(2004.04.08)
- [사설] 체니 방한과 '진보 국회'의 대미관(2004.04.17)
- [사설] 파병, '외교적 부도(不渡)' 내서야(2004.05.10)
- [사설] 대한민국을 '기회주의 국가'로 만들려는가(2004.05.14)
- [사설] 입닫은 열린우리당(2004.05.19)
/ (2004.07.31)



- 어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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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오늘>에 기고한 글입니다.
by 어른이 | 2004/07/31 10:25 | 문한별 칼럼(2004)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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