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금 만원을 들여 로또를 샀습니다.
큰 맘 먹고 어제 드디어 만원짜리 '로또' 한 장을 샀습니다. 숫자 1에서 45까지 제 마음에 드는 숫자를 맘대로 선택해서 기입할 수 있는 공간이 5개씩이나 연속으로 붙어 있는 평범한 종이딱지더군요. 대한민국을 대박열풍으로 뒤집어 놓은 요물이 이렇게 생겼구나! 신기했습니다. 당첨될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움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이걸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배가 부르더군요.

700억, 그것은 내겐 추상입니다. 구상으로 인식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꿈의 영역입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아예 무감각 그 자체입니다. '억'소리를 모르고 살아 온 못난 사람이라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로 그 앞에서 나는 식구들과 더불어 재미난 공상을 즐깁니다. 700억 타면 뭘 할까? 등등. 집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기대에 들떠 환상여행에 동참합니다.

저녁밥상을 물리고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차례로 '로또'의 빈칸을 채웠습니다. 각각 하나씩 맡고, 남은 하나는 숫자를 단위별로 나누어 식구들이 무작위로 부르는 것 중에서 일치하는 수로 기입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서로 마음이 통했는지 숫자를 모두 채우는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더군요. 완성된 로또를 보니 기분이 달아오르는 모양입니다. "어서 토요일이 왔으면"이라는 말이 합창처럼 터져 나옵니다.

그를 보며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마다 1등 당첨을 소원하며 몇십만원 심지어 몇백만원씩 들여 로또를 구입한다는데, 과연 700억을 갖게 되면 행복할까? 내 생각엔 오히려 불행해질 것 같아. 우리만 해도 당장 큰 돈이 생긴다면, 지금보다 더 넓은 집에서, 더 비싼 옷을 입고, 더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살고 싶겠지. 누구든 그렇지 않겠어?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는 건 아냐.

우리에겐 가족끼리 알콩달콩 모여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공간이면 충분해. 집이 필요 이상으로 넓으면, 넓어진 그만큼 가족 간의 정도 멀어지지. 누구네 집처럼 100평이 넘으면 집에 들어서는 순간 썰렁하지 않겠어? 좋은 옷 입으면 남에게 일시적으로 자랑은 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걸로 내면의 빈곤을 가리진 못해. 또 값비싼 음식을 먹으면 건강할까? 맛은 더 좋을지 몰라도 밑으로 나오는 건 다 똑 같아."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듣습니다. 집사람은 소리없이 웃습니다. "내가 문제 하나 낼께.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가 어딘지 아니? 바로 방글라데시야. 가난하기로 소문난 나라지. 반면 부자나라인 덴마크는 무엇이 세계 제일인지 알아? 바로 자살율이야. 이게 무얼 말하는고 하면, 행복은 돈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거야.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돈만 많으면 절로 행복해지는 줄 착각하고 있어.

부자들의 집을 생각해 봐. 하나같이 높은 담에 가시철조망을 두르고 CCTV를 설치하고 있지? 왜? 가진 것이 많으니까 그걸 지키려고 발버둥하는 거아. 그 사람들은 그런 것 없이는 한시도 편하게 발 뻗고 살지를 못해. 생각하면 불쌍하지 않니? 뉴스를 보면, 유괴.납치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부자들이더라. 그러니 바깥에 나갈 때마다 얼마나 불안하겠어. 보디가드들을 고용하는 것도 다 그 때문 아니겠어?"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합니다. "너희들, 돈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니? 인간관계를 파탄시키는 배후가 바로 돈이야. 멀쩡한 부모자식지간이 한 순간에 원수로 돌변하는 것도, 한 베게를 쓰던 부부지간에 칼부림이 이는 것도 다 돈이 개입돼서 그러는 거야. 돈이 있는 곳에 범죄가 있고, 범죄가 있는 곳에 돈이 있어. 돈이 인간의 마음에 사악한 욕망을 불러 일으키고, 나아가 인간을 지배하려 들거든.

히브리어로 돈을 뜻하는 '케세프'라는 말이 있는데, 그게 '탐내다, 열망하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야. 만족할 줄 모르는 돈의 탐욕적 속성을 잘 나타내주는 단어지. 부자가 "이만하면 됐다"고 만족하는 것 봤어? 아니지. 부자일 수록 더 인색하고 더 탐욕스러워. 가지면 가질 수록 더 많이 갖고 싶어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거든. 탐욕(헬.플레오넥시아스)이라는 말 자체에 그런 뜻이 내포돼 있어.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랑한 부자청년의 이야기 알지? 그 사람도 "네 가진 것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 주라"는 예수의 한 방에 그대로 나가 떨어졌잖아? 오죽 했으면 예수께서 "부자가 천국 가기는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을까. 예수는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셨어.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하나님께 돈 많이 벌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니까."

아이들이 웃습니다. 내친 김에 탄력을 받아 마저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돈(資)으로 으뜸(本)을 삼는 세상에서 살고 있어. 자본주의가 뭐야? 돈이 최고라는 거 아냐? 사람들은 지갑에 있는 돈만 쳐다보지 내면의 인격 같은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구. 그러다 보니 저마다 돈, 돈, 하며 눈이 빨개져서 미쳐 돌아가고 있어. 서로 부자될려고 수단 방법을 안가리지. 착해서는 돈 못 버는 세상 아냐?

'Money talks'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 그래, 맞았어. 돈이면 안되는 게 없다는 거야. 돈이 말하는 세상, 돈으로 하나님을 삼고, 돈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세상, 그게 우리가 발딛고 사는 이 땅의 모습이지. 신앙으로 산다는 건 이런 것과는 구별된 삶을 산다는 거야. 눈에 보이는 돈의 권세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근본을 삼는 삶 말이야.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잖아?"

"에구, 알았어요. 얘들아, 우린 당첨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자." 집사람이 말합니다. "기도 안해도 돼요. 어차피 안될 테니까." 아들놈이 화답합니다. 나는 이야기를 마무리할 겸 "돈이 필요하기는 하되 지나치게 많은 돈은 행복을 가져오기보다 불행을 가져오기 쉽다는 것, 돈은 생의 목적이 아니며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이어 "기왕이면 남에게 꾸지 않고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했습니다.

이날 저녁 내내 우리는 로또를 화제삼아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로또에 당첨될 걱정(?)없이 오히려 그를 산 교재삼아 자식들을 교훈하고 덩달아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니 이것만으로도 본전은 충분히 뽑은 셈 아닙니까? 나는 식구들과 함께 가쁜 마음으로 토요일을 기다릴 것입니다. 약간의 설레임과 흥분을 양념삼아 그날 또한 즐거운 대화가 이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이만하면 내가 왜 거금 만원을 들여 로또를 샀는지 아시겠지요?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아굴의 기도, 잠언 30:8-9) / (2003.02.07)



- 어른이 -
-------------------------------------------------------------------------------------------------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입니다.
by 어른이 | 2003/02/07 10:21 | 문한별 칼럼(2003) | 트랙백
트랙백 주소 : http://iandyou.egloos.com/tb/2626984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언어는 '지금' '여기서' 화육되지 않으면 안된다. 현장의 언어로..
by 어른이 2007 이글루스 TOP 100
Calendar
카테고리
공지사항
문한별 칼럼(2019)
문한별 칼럼(2018)
문한별 칼럼(2017)
문한별 칼럼(2016)
문한별 칼럼(2013)
문한별 칼럼(2012)
문한별 칼럼(2010)
문한별 칼럼(2009)
문한별 칼럼(2008)
문한별 칼럼(2007)
문한별 칼럼(2006)
문한별 칼럼(2005)
문한별 칼럼(2004)
문한별 칼럼(2003)
문한별 칼럼(2002)
문한별 칼럼(2001)
문한별 칼럼(2000)
문한별 칼럼 BEST
-----------------
한국 개신교는 지금...
교회개혁을 위한 묵상
짧은 설교
성경 강해
성경공부(강의) 연재
한자로 풀이한 성경
-----------------
한별의 시편
살아가는 야그
안티조선 1인시위(2001)
먹는 즐거움
[중드] 후궁견환전
-----------------
촛불혁명 & 적폐청산
2017 제19대 대선
2019 기해왜란
조국 사태 - 검찰의 난
문재인 정부(2017~22)
-----------------
Politic issues
Social issues
crazy media
today's cartoon
all that sports
laugh with me
and so on....


최근 등록된 덧글
웬만하면 읽어보고 답하..
by 어른이 at 16:36
안읽어봤으나 빙고. 젊은..
by 까진 돌고래 at 00:09
'악뮤' 찬혁 사진은 참..
by 어른이 at 11/12
근데 찬혁군은 잘생겼..
by 까진 돌고래 at 11/12
그렇군요.
by 여신같은 북극곰 at 11/11
조선일보는 '조선놈 일보'..
by 어른이 at 11/11
"숨기고 있던 본성"이 ..
by 어른이 at 11/11
뭐.... 숨기고 있던 본..
by 여신같은 북극곰 at 11/10
뭐 어차피 조선놈 일보가 ..
by 여신같은 북극곰 at 11/10
일본차가 불매운동을 견..
by 어른이 at 11/10
가 볼 만한 곳...


네오이마주
포토로그

바람 불어 좋은 날...
이글루링크
이글루 파인더

rss

skin by zodiac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