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 논설위원의 수준을 보여주는 글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기세 좋게 나서기에 조종사파업이 제법 갈 줄 알았는데 여론이 닦달을 하니까 이틀을 못 넘기고 돌아섰다.

'억대 연봉의 고소득자'라는 비판이 부담 됐는지 모르지만 기실 봉급이 많다고 해서 파업하지 말란 법은 없다. 이번 파업의 절차와 명분이 적절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라면 왜 대한항공 조종사인들 파업을 할 수 없단 말인가. 지난달 봉급도 두둑이 받아 놓았겠다, 당분간 먹고 살 걱정도 없으니 악착같이 파업을 해서 얻을 것은 더 얻어내는 것이 현명한 짓이다..."(동아, 이규민 칼럼, <정부를 '물'로 보는 사람들>)

지난 6.15, [동아광장]에 실린 글이다. 글 쓴 이는 이규민 동아일보 논설위원. 인터넷을 통해 동아일보를 뒤져보다가 나는 이 글을 보고서 내 눈을 의심했다. "아니, 이것이 동아일보 논설위원이 쓴 글이란 말인가?"

정말 밀 그대로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언필칭 '조-중-동 못난이 삼형제'라지만 "그래도 동아일보는...." 하고 기대하는 구석이 마음 한 귀퉁이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대기업과 형제지간인 중앙일보 논설위원도 아니고, 붉은색 알레르기를 갖고 있는 조선일보 논설위원도 아니고, 말끝마다 "민주화의 전통"을 자랑하는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이 이런 글을 쓰다니...!

대한항공 조종사들의 파업이 "제법 갈 줄 알았는데" 그 놈의 "여론의 닦달" 때문에 "이틀을 못 넘기고" 조기에 끝나버려서 이 위원은 섭섭했던가? 그런데 이 위원은 "여론의 닦달"에 동아일보도 한 몫 크게 했다는 사실을 몰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 "가뭄에 연대파업 겹쳐 경제 상반기 최대 고비"(6.12, 정치면)
- [가뭄에 파업까지/전문가 진단]"고소득 직종 파업 자제해야"(6.12)
- [경제 상반기 고비]항공수송 하루 6800달러 '비상'(6.12)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6.14,15일 이틀 연속 사설을 통해 ;

"90년 만의 가뭄으로 온 국민이 시름 속에 하늘을 지켜보고 있던 터에 벌어진 민주노총 주도의 파업으로 나라 전체가 심란하고 혼란스럽다.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파업 때문에 얼마나 많은 기업인들이 사업 의욕을 잃고 있는지 정부는 알기나 하는가..."- (사설, <이 지경까지 정부는 뭐했나>, 2001.06.14)

"이번 사태의 핵심이었던 대한항공을 보면 이틀 간의 파업으로 300억원 가량(회사측 추정)의 손실이 났고 국제적 신인도의 추락과 승객 불편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렵다. 그러나 타결된 합의 내용을 보면 꼭 연대파업 참여라는 수단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었는지 의문이다... 연대파업이라는 방법도 그렇고, 가뭄과 경제난이 심한 시기를 선택한 것도 잘못된 것이었다..."(사설, <연대파업 재발 막으려면>, 2001.06.15)


이 모양 대한항공 조종사들의 파업을 강력하게 비난해 놓고는 이제 와서 "여론의 닦달" 운운하며 파업을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내뱉다니~! "파업의 절차와 명분이 적절했는지조차 의문"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해도 되는 것일까?

게다가, "기실 봉급이 많다고 해서 파업하지 말란 법은 없다"고? "지난달 봉급도 두둑이 받아 놓았겠다, 당분간 먹고 살 걱정도 없으니, 악착같이 파업을 해서 얻을 것은 더 얻어내는 것이 현명한 짓"이라고?

생계를 걱정하며 주린 배를 움켜쥐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들으면 심장이 터져 죽을 소리다. 언제부터 파업이 먹고 살 걱정 없는 부르죠아들의 꽃놀이패가 되었는가? 하긴 힘 없는 노동자들의 파업은 "집단 이기주의"요, 힘 있는 의사들의 파업은 "자존심 지키기"(조선일보)라 말하는 무리들이 자칭 보수의 원류요, 정통 주류라 자처하는 세상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그 다음 말이다.

"단 부탁하건대, 앞으로 또 파업을 하게 되더라도 제발 당신들은 붉은 머리띠만은 두르지 않기를 바란다. 조종사가 '투쟁'을 새긴 시뻘건 천을 머리에 두르고, 붉은 조끼를 입은 채 보잉 747점보기를 몰아 1만피트 상공을 날아가고 있고, 내가 그 비행기에서 까마득한 발 아래 망망대해를 내려다보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모골이 송연한 일이다.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동네 소아과 의사선생님이 박박 깎은 머리에 '쟁취'의 각오를 담은 붉은 띠를 두르고, 환자로 찾아 온 갓난아기 심장에 청진기를 들이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그야말로 닭살 돋는 일 아닌가.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좀 더 독창적이고 이지적인 수단을 택해야 자존심이 지켜지고 호소력도 얻게 된다..."


조종사나 의사들처럼 "봉급이 많고", "남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파업할 때라도 "좀 더 독창적이고 이지적"으로 하란다. 그래야 "자존심이 지켜"지고 품위가 유지된단다. "붉은 머리띠" 같은 불순한 것은 가난한 노동자들이나 두르게 하고, 지체 높으신 조종사들이나 의사들은 제발이지 삼가해 달란다. "시뻘건 천을 머리에 두르고 비행기를 모는 조종사"나 "빡빡 깍
은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진찰하는 의사선생님의 모습"은 자기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그림이란다.

이게 논설인가, 개그인가. 이 위원 말대로라면, 이젠 파업도 신분과 계급에 따라 가려서 해야 할 모양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 되겠다 ;

"저소득 종사자들은 땅바닥에 그냥 앉아 주세요. 빨간 머리띠와 빨간 조끼를 나눠 드릴테니 한 분도 빠짐없이 착용하고서 "투쟁"과 "쟁취"를 열심히 외쳐주시기 바랍니다. 고소득 종사자들을 위한 자리는 단상 위에 따로 마련했습니다. 이분들이 자존심과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조치했으니 이해해 주시고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빌어먹을! 힘 있는 사용자들의 부당한 압력에 대항해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키자는 파업현장에서까지 노동자들은 차별대우받는구나. 못 배우고 못 가진 노동자들은 자존심도 없단 말이지? 자존심은 정녕 가진 자들만의 전유물이렸다!

더 말하고 싶지도 않다. 이런 정도의 글 밖에 쓰지 못 하는 자들이, 아니 이런 정도의 저열한 인식수준 밖에 못 가진 자들이 소위 일류신문사의 논설위원으로 활약하는 이 땅에서 산다는 자체가 내겐 "모골이 송연한 일"이요, "닭살 돋는 일"이다.

"남들이 선망하는 대(大?)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쯤 되는 사람이라면 좀 더 현실에 부합하고 바른 글을 써야 그나마 자존심이 지켜지고 호소력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이규민 논설위원은 알기나 하는걸까? (2001.06.18)



- 어른이 -
by 어른이 | 2001/06/18 10:44 | 문한별 칼럼(2001)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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