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말고"를 단죄하기 전에...
조선일보가 '아니면 말고'식의 정치폭로극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며 정면대응을 선언하고 나섰습니다. 조선일보는 24일자 사설 <「아니면 말고」용납할 수 없다>에서 "일체의 폭로는 증인 ·증거를 동시에 그리고 충분히 공표해야 한다"면서, 물증도 없이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측에게 최규선씨로부터 2억5000만원이 흘러 들어갔다는 수뢰설을 발설한 설훈 의원을 강한 톤으로 비판했습니다.

조선일보의 사설내용은 그 자체로 정당하고 옳습니다. 문제는 시점입니다. 조선일보의 올바른 지적이 왜 이제서야 터졌는지, 아니 터져야만 했는지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한나라당 의원들의 입에서 근거없는 폭로가 난무할 때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혹은 폭로극에 편승해 민주당 의원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부쳤던 조선일보가 갑자기 입바른 소리를 하고 나서는 까닭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아시다시피 '아니면 말고'의 원조는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입니다. 99년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김대중 대통령을 가리켜 "빨치산 수법을 쓴다"고 독설을 퍼붓고 정부.여당이 이에 발끈하며 사과를 요구했을 때, 이 전 총재가 내뱉은 말이 바로 저 유명한 '아니면 말고'였습니다. 그 말은 이후 정치권의 근거없는 폭로를 일컫는 전문용어로 승격되기에 이르렀고, 여야의 물고 물리는 정치공세 속에 온 국민이 애용하는 유행어가 됐습니다.

'아니면 말고'란 폭로극으로 가장 짭잘하게 장사를 한 집단을 꼽으라면 단연 한나라당과 조선일보를 꼽아야 할 것입니다. 한나라당과 조선일보는 한 쪽이 면책특권을 이용하여 무차별 의혹을 터트리면 또 다른 쪽은 전지면을 동원해서 기사로 팍팍 밀어주는 환상의 파트너쉽을 선보이며 김대중 정권을 줄곧 압박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습니다.

지난해 10월, 한나라당의 안경율, 유성근 의원이 국회 대정부질의 시간에 면책특권을 이용해 '이용호게이트'의 몸통으로 김홍일, 권노갑 의원 등의 실명을 공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정국이 발칵 뒤집어졌음은 물론입니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주장에 근거를 대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조선일보는 그들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외려 감싸기에 급급했지요.

조선일보는 2001년 10월 22일자 사설 <웬 면책특권 타박?">을 통해 "야당의원들이 김홍일 의원 등의 이름을 실명으로 거론한 것은 현 정부 하에서의 가장 큰 ‘금기(禁忌)’중 하나를 깨뜨린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번에 그의 이름이 공개된 것은 집권측에도 차라리 좋은 기회일 수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았습니다.

조선일보는 또 "시중에서 유포되고 있는 음해성 루머들을 충분한 증거나 확인절차도 없이 국회에서 마구잡이로 유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냐?"는 항변에 대해서 "김 의원이 진실로 결백하다면 차제에 항간에 회자되는 소문들의 진위를 말끔히 밝힘으로써 김 의원 자신 뿐 아니라 아버지인 김대중 대통령, 그리고 이 정권을 짓눌러온 부담을 후련하게 떨쳐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한한 논리를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보다 한달 앞서, 한빛은행 부정대출과 관련하여 한나라당 의원들이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과 권노갑 민주당 최고위원 등 소위「동교동 고위 가신」급들이 사건에 관여했다는 제보가 있다며 연신 공세를 퍼부었을 때도, 조선일보는 "모든 것이 「야당의 엉터리 공세」라면,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국정조사나 특검제를 동원하는 일에 주저치 말아야 한다"는 독특한 논지를 펴서 만인의 감탄(?)을 자아냈습니다.([사설] 세상이 웃을‘단순 사기극’, 2001.9.10)

조선일보의 대응이 이런 식이었습니다. 한나라당의 무차별 폭로전술에 의해 여당이 곤혹스러워지면, 조선일보는 여당을 향해 "진실로 결백하다 해도 부담을 떨치기 위해서라도 자발적으로 진위를 밝히라"고 강요했고, "야당의 공세가 엉터리라면 또한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은 국정조사나 특검제를 받아야만 한다"고 윽박질렀습니다. 반대로 민주당이 한나라당에 의혹을 제기하면 조선일보는 당장 구체적인 근거를 대라고 추궁했습니다. 논리가 얼마만큼 타락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볼까요? 2000년 11월, 동방상호신용금고 불법대출사건으로 여야갸 첨예하고 대치하고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한나라당의 정형근 의원이 "정부 여당의 커넥션을 입증할 관련 인사의 명단 확보" 운운하며, 영문이니셜을 딴 이른바 'KKK'설을 제기했습니다. 파장은 엄청났습니다. 정치권은 마주 달리는 기관차처럼 충돌 일보 직전이었고, 국민들은 명단을 공개하라며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정 의원은 끝내 명단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가 그때 사설에서 무어라 말했는지 잠깐 들어보시겠습니까?

"한나라당의「여권 커넥션」설이 어느 정도 신빙성을 지니고 있는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4·13 총선 직후부터 줄곧 여권인사들이 주가조작으로 선거자금을 마련했다는 풍문이 나돈 점과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관련 인사 명단확보」운운하며 운을 떼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뭔가 있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이 사건은 금융감독원뿐 아니라 정권 실세까지 개입된 대규모 권력형 비리의 일부라는 이야기인 셈이다...."([조선 사설] "K실세 누구인가", 2000.10.26)

조선일보는 "명확한 근거 없이 한건주의식으로 터트리는 이런 폭로전은 청산되고 근절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말고' 식의 저질폭로극은 용납될 수 없다"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고 발뺌하면서도 "풍문이 나돌았다", "『뭔가 있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며 의혹들을 모듬으로 배열하고, 나아가 "그렇다면.... 셈이다"고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원맨쇼를 유감없이 펼쳐보일 뿐이었습니다.

그 뒤, 한나라당의 이주영 의원이 국회 법사위에서 면책특권을 이용해 정현준 사설펀드에 가입한 의혹을 받고 있는 'KKK'의 실명을 공개해서 또 한 번 물의가 일었습니다. 이 의원은 당시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던 박순용 검찰총장에게 이들의 명단이 있는가 확인하라고 다그쳤습니다. 박 총장은 명단확인 결과 이 의원이 거명한 이들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민주당은 즉각 이 의원에 대해 의원직 제명을 추진하는 한편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겠다고 나섰고, 한나라당은 한나라당대로 면책특권을 내세우며 역공을 가하는 등 정치권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태가 이쯤되면 한 마디 할 법 한데도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조선일보는 가타부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정치판이 이처럼 시끄럽고 혼란스러운데도 그 흔한 사설 하나 쓰지 않고 철저하게 침묵을 지킨 것입니다. 근거도 없는 폭로전으로 일관하여 정치를 극한 대결의 장으로 몰고 간 한나라당에 대해서도 조선일보는 비판의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일보가 겨우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보름이 지나서, 그것도 주간조선의 기사를 통해서였습니다.

"한국 정치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했다가 슬그머니 사라지곤 했던 '폭로정치'가 또 다시 등장해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폭로 소동은 이 의원 스스로 밝혔듯이 명백한 증거나 근거가 없이 시중에 떠도는 루머를 의원의 면책특권이 인정되는 국감장에서 여과없이 언급했다는 점에서, 또 여권 실세들의 실명을 거론했다는 점에서 공방은 그만큼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주간조선, 2000.11.14)

이주영 의원을 비롯한 한나라당 의원들의 폭로공세가 "명백한 증거나 근거가 없이 시중에 떠도는 루머를 여과없이 언급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조선일보도 결국 시인했습니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이번 설훈 의원 건에서 보았듯이 "'아니면 말고' 식의 저열한 폭로공방은 용납될 수 없다"며 한나라당과 이주영 의원을 준열하게 꾸짖지 않았습니다. 대신 두루뭉실하게 여와 야를 싸잡아 양비론적으로 비판한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니면 말고’ 식이나 미운 상대에게 흠집만 내면 그만이라는 식의 폭로는 여.야 할 것 없이 곤란하다는 것이 중론이다...."(앞글)

조선일보말마따나 '아니면 말고'식의 치고 빠지는 정치공세가 끼치는 폐해는 여와 야를 가릴 것 없이 심대합니다. 그럴진대 조선일보는 마땅히 여든 야든 상대를 가리지 말고 공평하게 책망하고 꾸짖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다시피 조선일보가 여야를 대하는 태도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현격한 차이가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조선일보가 4월 24일자 사설 <「아니면 말고」용납할 수 없다>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고도 네티즌들에게 욕을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왕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만 더 말하겠습니다. '무책임한 폭로의 일인자' 하면 뭐니뭐니해도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을 따라갈 자가 없습니다. 그는 한나라당 내 '김대중 저격수'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공작정치의 전문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책임지지 못할 말을 너무나 많이 남발했고 그로 인해 야기된 정치파행만도 부지기수입니다. 그런 그에게 왜 조선일보는 비판의 말 한 마디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설훈 의원을 무섭게 다그치던 그 기개는 다 어디로 간 것입니까?

언론의 생명은 신뢰에 있고, 신뢰는 공정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조선일보가 스스로를 언론이라고 자처한다면 사설에서 올바른 말을 하고도 왜 독자들에게 비웃음을 받는지 곰곰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사설 <100자평>란에 실린 많은 글들이 조선일보의 자가당착 내지는 자기모순을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면 말고'식 수법을 가장 잘 우려먹은 조선일보가 이제와서 '아니면 말고'식 행태를 단죄하는 것은 '누워서 침뱉는 격'이라고 냉소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조선일보는 이들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조선일보의 이중성을 질타하는 국민들의 분노를 읽어야 합니다. 국민들은 조선일보에게 개과천선 혹은 환골탈태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는 언론이 자신에 대한 비판에는 어찌 눈을 감고 귀를 막으려 합니까? 조선일보에게 다시 말합니다. 국민을 가르치려 들지 마십시오. 국민은 어리석지 않습니다. 국민 앞에 겸손하십시오. 국민을 무섭게 여기고 낮아지십시오. 그러면 살 희망이 있습니다. 조선일보를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2002.04.25)



- 어른이 -

by 어른이 | 2002/04/25 11:06 | 문한별 칼럼(2002) | 트랙백 | 핑백(1)
트랙백 주소 : http://iandyou.egloos.com/tb/2626598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Linked at Incarnation : "악.. at 2018/01/29 07:12

... "아니면 말고"를 단죄하기 전에... ... more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언어는 '지금' '여기서' 화육되지 않으면 안된다. 현장의 언어로..
by 어른이 2007 이글루스 TOP 100
Calendar
카테고리
공지사항
문한별 칼럼(2019)
문한별 칼럼(2018)
문한별 칼럼(2017)
문한별 칼럼(2016)
문한별 칼럼(2013)
문한별 칼럼(2012)
문한별 칼럼(2010)
문한별 칼럼(2009)
문한별 칼럼(2008)
문한별 칼럼(2007)
문한별 칼럼(2006)
문한별 칼럼(2005)
문한별 칼럼(2004)
문한별 칼럼(2003)
문한별 칼럼(2002)
문한별 칼럼(2001)
문한별 칼럼(2000)
문한별 칼럼 BEST
-----------------
한국 개신교는 지금...
교회개혁을 위한 묵상
짧은 설교
성경 강해
성경공부(강의) 연재
한자로 풀이한 성경
-----------------
한별의 시편
살아가는 야그
안티조선 1인시위(2001)
먹는 즐거움
[중드] 후궁견환전
-----------------
촛불혁명 & 적폐청산
2017 제19대 대선
2019 기해왜란
조국 사태 - 검찰의 난
문재인 정부(2017~22)
-----------------
Politic issues
Social issues
crazy media
today's cartoon
all that sports
laugh with me
and so on....


최근 등록된 덧글
- 논지와 전혀 상관없는..
by 어른이 at 02:27
왜차단하는데용? 나 최자..
by 까진 산타클로스 at 00:54
이런 글은 자신의 일기..
by 어른이 at 00:53
저님 나랑 갑에 동창친구..
by 까진 산타클로스 at 10/14
이제 곧 세진쨩이 세계..
by 까진 산타클로스 at 10/14
국가적으로 서로 냉랭한..
by 타마 at 10/11
그러니까 더더욱 특검해..
by 어른이 at 10/11
근데 이제와서 윤석열 ..
by 마즈피플 at 10/11
같은 과라 통하는 게 있..
by 어른이 at 10/10
가장 정확하게 예측한 ..
by 빈센트 at 10/10
가 볼 만한 곳...


네오이마주
포토로그

바람 불어 좋은 날...
이글루링크
이글루 파인더

rss

skin by zodiac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