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와 '면책특권'
<풍경.1>

지난 98년 10월, 국민회의 정한용 의원이 국정감사장에서 면책특권을 이용해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비자금 1천억원 조성설'을 제기했을 때, 조선일보는 "루머도 면책특권인가?"(1998.10.29)이라는 사설을 통해 정 의원의 발언은 "공인으로서 적절치 못한 발언"이었다고 비판하며, "우선 이같은 민감한 사안을 발설할 때는 확인절차를 거쳐 충분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국회의원이 시중에 나도는 신빙성 없는 루머 등을 내세워 국정질의를 한다는 것은 "의원의 자질문제이며 정치윤리에도 어긋나는 처사"라고 따끔하게 꼬집고, 면책특권을 앞세워 증거도 불충분한 무책임한 발언을 일삼는 그런 식의 자세 때문에 "명예훼손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조선일보는 또 "시중에서 의혹이 제기된 이상, 루머라도 조사의 단초가 될 수 있지 않느냐?"는 정 의원측의 반론에 대해서는 "억지나 다름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하고, 국회의원이 얼토당토 않은 타인 비방이나 음해성 루머들을 조사의 단초로 삼는다면, 이는 "각종 매체를 통한 비윤리적 행위들을 정당화하는 것이며, 그렇게 되면 나라꼴은 엉망이 되고 만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정 의원은 면책특권이 보장된 만큼 어떤 발언을 해도 된다는 주장인 모양인데, 이는 법 취지를 잘못 알고 있거나 남용한 것", "'…카더라'가 아직 대한민국 국회에서 통용된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풍경.2>

지난 주 한나라당 안경율, 유성근 의원이 국회 대정부질의 시간에 면책특권을 이용해 '이용호 게이트'의 몸통으로 김홍일, 권노갑 의원 등의 실명을 공개했습니다.

조선일보는 오늘자(2001.10.22) 사설("웬 면책특권 타박?")에서 "야당의원들이 김홍일 의원 등의 이름을 실명으로 거론한 것은 현 정부 하에서의 가장 큰 '금기(禁忌)' 중 하나를 깨뜨린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번에 그의 이름이 공개된 것은 집권측에도 차라리 좋은 기회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한나라당 의원들의 명예훼손적인 발언을 문제삼아 '면책특권 제한' 주장을 들고 나온 민주당 지도부의 움직임을 "문제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거나 혹은 일부러 외면하려 하는 볼썽사나운 대응"이라고 강도높게 비난하며, 면책특권은 "극소수를 제외한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행정부와 권력에 대한 통제장치로 두고 있는 제도"라고 적극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조선일보는 또 "시중에서 유포되고 있는 음해성 루머들을 충분한 증거나 확인절차도 없이 국회에서 마구잡이로 유포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냐?"는 항변에 대해서는 "김 의원이 진실로 결백하다면 차제에 항간에 회자되는 소문들의 진위를 말끔히 밝힘으로써 김 의원 자신뿐 아니라 아버지인 김대중 대통령, 그리고 이 정권을 짓눌러온 부담을 후련하게 떨쳐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한한 논리를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문단에서 조선일보는 "면책특권 한계" 운운한 신승남 검찰총장을 겨냥하여 "어이없고 개탄스러운 일", "직위의 권능에 대한 중대한 착각의 소치이거나 아니면 그 뜻을 알 수 없는 과잉반응"이라는 말로 크게 비판했습니다.

<덧글.1>

한나라당 안경율 의원이 '이용호 게이트'의 몸통을 공개한다며 김홍일 의원 등의 실명을 거론한 10월 19일, 공교롭게도 조선일보 <만물상> 코너에는 정치인들의 이름을 이니셜로 표현하는 기존의 관행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실명공개를 종용하는 요지의 칼럼이 실려 있었습니다.

"'여권실세 K씨'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뻔히 알면서도 실명을 보도할 수 없는 언론의 입장은 독자만큼이나 답답하다...."

"'면책특권'을 가진 국회의원들조차 몸을 사리는 건지 연일 알쏭달쏭한 이니셜들만 쏟아내고 있으니, 이래저래 짜증스런 퍼즐 조각 맞추기에 애꿎은 국민만 머리가 셀 지경이다...."(<만물상> 이니셜, 2001.10.19)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조선일보가 이 글을 올린 직후에 한나라당의 실명공개가 터져 나왔고, 이를 계기로 조선일보의 정치적 편당성과 언론의 권한 남용, 그리고 정언유착이 새삼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덧글.2>

한건주의식 폭로와 무책임한 정치공세가 관련 당사자들에게 얼마마한 피해를 입히는지에 대해 조선일보는 이례적으로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잠깐 들어 보시겠습니까?

"물론 야당은 '분명 뭔가 있다'는 심증으로 의혹을 제기한 것이며, 정치 공세라는 차원에서는 결과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의원의 '질문'은 신문에 큼직한 제목으로 보도됐으며 이름이 거론된 네 사람은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어? 뭔가 있긴 있을 거야"라며 의혹 던지기를 좋아하는 여론에 의해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고, 면책특권이 있다고 해서 확인되지도 않은 폭로를 무책임하게 해도 되느냐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후진성을 띠고 있는 한국 정치에서 '폭로'는 마음 먹고 제기하는 측에는 적잖은 정치적 이익을, 반면 당하는 쪽은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입는 경우가 많다. '아니 땐 굴뚝에'라는 세간의 정서를 타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폭로자는 '밑져 봐야 본전'이지만 당한 이들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주장할 경우 '안했다'고 증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고 혀를 내두른다...."("저질 폭로"인가 "의혹 검증"인가?" , 2000.11.14)


앞에서는 피해자의 인권을 걱정하는 듯이 말하면서도, 뒤에서는 면책특권을 암시하면서 실명공개를 종용하는 칼럼을 쓴다는 것, 아니 한나라당의 무책임한 실명공개를 오히려 피해당사자들에게 잘된 일이라며 반색하는 사설을 쓴다는 것, 이를 가리켜 야누스적 본성을 지닌 두 얼굴의 조선일보라 말해서 잘못됨이 없을 것입니다.

<덧글.3>

조선일보는 앞의 사설(2001.10.22)에서 "(면책특권은) 극소수를 제외한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행정부와 권력에 대한 통제장치로 두고 있는 제도"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널리즘 한국학"의 창립자이자 "조선일보의 5대 칼럼니스트 중의 한 명"으로 불리우는 이규태 씨는 지난 해 "금배지"라는 글에서 이와 상반된 듯한 말을 해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얼마 전 국제의원연맹이 작성한 130여 국가의 의원실태보고서에 보면 의원특권이 세계적으로 축소되는 추세라 하고, 의원 발언의 면책특권이 작아지고 있으며 의원 자격기준을 도입해 의원으로서의 자질이 평가되고, 투명한 재산 공개와 견책 징계가 늘고, 의원 윤리가 강화되는 것 등을 들었다...."(이규태코너, 금배지, 2000.6.5)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조선일보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아니겠습니까? 공작의 날개처럼 시도 때도 없이 옷을 갈아입는 조선일보의 현묘한 말재주는 정녕 대한민국 으뜸이라 하여 잘못됨이 없을 것입니다.(2001.10.22)



- 어른이 -

by 어른이 | 2001/10/22 09:00 | 문한별 칼럼 BEST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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