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파공작원들을 두 번 죽일 셈인가?
"휴전 후 북한에 파견되었던 특수요원 문제가 최근 쟁점이 되고 있다...."

조선일보 사설의 첫머리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대뜸 15일 서울 세종로 앞에서 벌어졌던 북파요원의 도심 시위 장면을 떠올리실 게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내가 인용한 이 글은 지난 2000년 11월 2일, 곧 민주당 김성호 의원에 의해 북파공작원들의 활동 실상과 현재 실태가 50쪽 짜리 리포트로 국회에 최초로 보고된 직후에 씌어진 것이다.(2000.10.29)

그러면 지금으로부터 무려 1년 반 전에 작성된 조선일보의 사설을 이 시점에서 다시 끄집어낸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북파요원에 대한 조선일보의 거짓말을 폭로하기 위해서다. 조선일보는 상기한 사설에서 북파요원에 대해 잘못된 주장을 잔뜩 늘어 놓았다. 조선일보가 북파요원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 지금부터 하나 하나 살펴 보기로 하자.

"북파 특수요원은 전쟁 중인 52년부터 7·4공동성명이 발표된 72년 이전에 주로 파견되었다. 이 기간엔 전쟁은 없었지만 남북대결이 가장 첨예했던 시기로, 개방된 우리 사회와 달리 폐쇄적이고 통제된 북한사회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이들의 파견은 불가피한 점이 있었다...."([사설] 북파요원-묵살 해선 안돼, 2000.11.03)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폐쇄적이고 통제된 북한 사회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북파 특수요원들이 파견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건 사기다. 명백한 거짓말이다. 그들은 조선일보가 주장한 것처럼 정보를 얻기 위해서 파견된 존재(스파이)들이 아니었다.(이에 대해서는 북파요원들의 임무를 말할 때 더 자세히 말하겠다.)

북한은 흉악무도한 테러 부대를 내보내는데 남한은 오직 정보를 얻기 위해 스파이를 보냈다는 것은 조선일보가 만들어낸 픽션이다. 문제는 그 픽션이 불식되기는 커녕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 북파공작원들의 서울 도심시위 직후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은 촌평을 내놓았다.

- 왕년 北派 공작원들, 도심서 시위. 오죽하면 그럴까 생각들지만 스파이까지 데모하는 세태는 씁쓸.([팔면봉] 2002.3.16)

'스파이까지 데모하는 세태는 씁쓸'하단다. 조선일보의 공식논평이다. 그런데 데모도 정해진 임자가 있다던가? 또 목숨 걸고 조국에 충성을 다한 대가로 조국에게 버림받은 북파공작원들은 데모하면 안되는가?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조선일보가 이들을 향해서 '스파이'라고 명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파이란, 조선일보식으로 이해하건대, '오직' 정보를 얻기 위해서 밀파된 존재들이다. 조선일보는 왜 굳이 북파공작원들을 스파이라는 말로 바꿔 부르려 하는 것일까?

그것은 남북에 선악의 이분법을 강요하고 남북 간에 대립을 심화.증폭시키려는 냉전적 발상 때문이다. 북한의 흉폭함을 부풀리고 남한의 잘못됨을 은폐.축소시키려는 거짓된 본성 때문이다.

"파견기간은 1주일 내외의 단기간이었으며...."

조선일보는 북파 공작원들의 파견기간이 1주일 내외의 단기간이라고 주장한다. 정말 그런가? `대한민국 대북참전 연대'의 회장인 박부서(70) 씨의 말을 들어 보자. 그는 연합통신과의 인터뷰 기사에서 53년 초에 들어가서 이듬해 11월까지 북파공작원으로 활약했다고 증언했다.(연합, 2001.8.20)

"임무는 정보수집과 함께 후방교란, 시설물 폭파, 적생포와 사살 등 간첩활동과는 다른 「작전적 임무」가 대부분이었다...."

조선일보는 북파요원들의 임무가 '정보수집'에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후방교란, 시설물 폭파, 적생포와 사살 등을 위주로 하는 (북한식) 간첩활동과는 '다른' 작전적 임무가 대부분이었다고 주장한다. 정말 그런가? 어제 서울 도심에서 가스통을 휘두르며 시위를 했던 북파공작원들은 이렇게 울부짖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인간백정이 되어야만 가능했던 임무수행과정에서 처절하게 파괴된 인성으로 아직도 사회적응을 못하여 갈등하고 있다...."(오마이뉴스, 2002.3.15)

그들이 도대체 무슨 임무를 수행해야 했길래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인간 백정이 되어야만 가능했던 그런 처절한 과정'을 겪어야만 했던 것일까?

"국군정보사령부가 작성해 보관해 온 종결공작원 명부라는 문서입니다. 부대원들마다 작전형태가 전선공작, 오지공작 등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주임무는 중요시설 폭파, 인민군의 납치와 사살, 후방교란 등이었습니다."(뉴스데스크-우리도 북파했다)

2000.10.2, MBC 뉴스데스크에서 보도된 내용이다. 10월 2일이면 '북파요원=정보수집하는 스파이'라는 조선일보 사설보다 한달 더 빠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선일보가 MBC 뉴스데스크에서 이같은 내용을 방영한 사실을 미리(한달 먼저) 알고도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는 것, 따라서 북파요원들에 관한 조선일보의 거짓말은 의도된 거짓말이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다.

"남북이 분단된 뒤 지난 70년대 초까지 정부는 북한에 비밀공작원들을 투입시켰습니다. 공작원들의 주요 임무는 요인 암살과 납치 그리고 시설물 폭파였습니다...."(뉴스데스크-잊혀진 특파공작원:이제는 말한다)

2002년 2월 24일 MBC 뉴스데스크에서 나온 기자의 설명이다. 이와 동일한 내용이 같은 날 밤에 방영된 [이제는 말한다:"북파공작원-조국은 우리를 버렸다"](50회) 시간에 또 다시 생생하게 증언됐다.

"그들은 단독침투와 팀을 이룬 침투를 했는데, 팀을 이룬 임무일 경우 동지가 부상을 당하면 증거인멸을 위해 사살을 해야 했다..."

"또 훈련기간 동안 받은 살인.폭파.요인납치 등의 인간성 말살 세뇌교육은 이들이 사회로 복귀한 후 제대로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했다..."(이상, 이제는 말한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북파공작원들의 임무가 정보수집에 국한됐단다. 후방교란이나 시설물 폭파, 적생포와 사살 등 간첩활동과는 다른「작전적 임무」가 대부분이란다. 조선일보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후안무치한 짓을 언제까지 계속할 셈인가? 진실만을 말해야 할 언론이 어찌 이런 거짓을 태연자약하게 늘어놓을 수 있는가?

조선일보가 이처럼 거짓말을 계속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을 내 모르지 않는다. 북파요원들에 대해 처음부터 '정보를 얻기 위해 파견된 스파이'라고 거짓말을 했으니 들통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거듭 거짓말퍼레이드를 늘어 놓아야겠지. 그 초조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런 짓을 하는 조선일보가 언론임을 자칭하는 것은 정말이지 이해가 안간다.

엄밀히 말해서, 조선일보가 한 짓은 이들 북파요원들을 두번 죽이는 짓이다. 이들은 뒤늦게나마 자기들의 존재를 당당하게 인정받고 싶어한다. 자신들과 관련된 진실이 숨김없이 밝혀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것이 서울 도심에서 제 몸에 자해를 해가면서까지 격렬히 시위한 제일의적 이유다.

"선발된 사람은 무연고자나 고아, 이북출신 등이었으며 신분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민간인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일보의 거짓말은 계속된다. 조선일보의 사설을 읽으면 북파요원의 선발도 별로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인용한 MBC 뉴스데스크의 보도에 의하면 비슷한 내용이라도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극빈층이나 부랑자, 전과자나 사형수들이 북파 대상자로 충원됐습니다. 목숨을 걸고 휴전선을 넘나드는 대가는 생계 보장과 전과기록 삭제...."(뉴스데스크, 2002.2.24)

이에 보다시피 북파요원들에 대한 조선일보의 주장은 하나같이 사실의 축소 내지는 왜곡, 그리고 의도된 거짓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엄정한 실태조사를 요구한다. 마치 자기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당국은 뒤늦었지만 지금부터 이들에 대한 실태조사와 함께 생존자와 유족들에게는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해야 한다.... 아울러 충혼탑 등을 건립해 이들의 넋을 기려야 한다..."

말인즉 옳다. 조국의 약속을 믿고 목숨을 걸고 싸운 이들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은 조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엄밀한 실태조사도 병행돼야 한다. 이 모든 일은 비단 정부에게만 요구되는 일이 아니다. 사실보도를 능사로 해야 하는 언론으로서 조선일보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조선일보에게 부탁한다.

조선일보는 이제라도 북파요원들의 고통에 대해 정직하기 바란다. 그들의 실체적 진실을 숨기고서 '스파이'라고 억지분장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이 특수공작원들을 남한땅에 파견해서 못된 짓을 자행했다면, 남한 또한 특수공작원들을 북한땅에 파견해서 그와 동일한 행위를 저질렀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명명백백한 사실을 가린다고 해서 북한에 대한 남한의 우월성이 확보된다고 생각하는가? 거짓으로 확보한 우월은 차라리 정직한 열등함만 못한 법이다. 서로 똑같이 잘못한 것을 정직하게 고백하지 않고 거짓을 조작해서라도 상대를 억누르려는 것은 평화에 마음이 없고 오직 대결하고 반목하는데만 마음이 쏠려 있음을 반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조선일보는 이제라도 남한은 선이요, 북한은 악이라는 구시대적인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소모적인 대결 구도 속에서 지난 날 남과 북이 서로 특수공작원들을 파견해 저지른 추악한 행태로만 따지자면, 남이나 북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조선일보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

조선일보가 진실로 북파요원들의 고통과 한을 이해하고 헤아리려 할진대, 지금이라도 사실을 낱낱이 밝히고 저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에 앞장서 주기 바란다. 그리고 지난 날 거짓보도로 그들을 두 번 죽인데 대해 사과하기 바란다. 그토록 국가를 중시하고 틈만 나면 애국과 안보, 인권을 노래하는 조선일보라면 마땅히 그리 해야 할 것 같아서 거듭 부탁하고 또 부탁하는 것이다. (2002.03.18)



- 어른이 -

by 어른이 | 2002/03/18 23:00 | 문한별 칼럼(2002)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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