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여러분, '사과' 먹고 속이 괜찮으십니까?
여름 무더위가 아직도 한참 남았는데 때 아닌 사과 풍년이다. X파일 문제가 불거진 이후 그와 연관된 신문지, 재벌, 하수인 등이 잇따라 사과문이란 걸 발표한 까닭이다.

중앙일보는 지난 25일 일면 박스로 "다시 한번 뼈를 깍는 반성을 하겠습니다"는 사설을 실었다. 같은 날 삼성도 "국민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로 시작하는 대국민 사과문을 내놓았다.

이틀 후인 27일에는 중앙일보 전 사주 홍석현 주미대사가 "안기부 도청 사건으로 인해 국민의 가슴에 상처를 남긴 것 같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며 사과문을 낭독했다.

점유율 1.2위를 다투는 재벌신문이 사과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거대기업이 사과하고, 주미대사까지 지낸 자타칭 '계몽군주'가 앞다투어 사과하니 배가 부를 법 하건만 그러나 이상하게도 속이 외려 쓰리고 공허하다. 이들이 내던지는 사과에 알맹이는 없고 잡스런 부스러기만 잔뜩 들어 있는 탓이다.

중앙일보는 "다시 한번 뼈를 깎는 반성을 하겠습니다"는 사설 옆에 그보다 큰 글자로 <중앙일보는 물론 다른 언론사 임원들도 도청, 입 열면 안 다칠 언론사 없다>는 협박을 내보냈다.

이어 3면 전체를 할애, "<"조선·동아 지금 제정신 아니야…역겨워>라는 제목을 달아 X파일을 보도한 조선과 동아에 이빨을 드러내는 한편, 4면에선 음모론을 제기했다. 누가 보더라도 중앙의 사과가 진심이 아니라 반격을 위한 면피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홍석현을 변명'으로 가득한 중앙 사설내용은 거론하고 싶지도 않다.)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사회적 물의를 빚은 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는 삼성의 사과문은 웃음조차 안나오는 '개그'('개같은 야그'의 준말)다. 사과는 잘못했을 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초딩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삼성은 잘못한 것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사회적 물의를 빚은 데 대해" 사과한단다. 이건 죄인으로서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백성을 위무하자는 짓이다. 오만도 이런 오만이 없다.

"아울러 어떠한 경우에도 옳지 못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용인될 수 없"다며 불법도청을 문제삼는 대목에선 세계초일류기업이라는 삼성의 아이큐마저 의심스러워진다. 보험용이든 뭐든 간에 삼성이 대선주자에게 뒷구멍으로 막대한 돈을 건넨 것 자체가 "옳지 못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여 목적을 달성하자는 것"인데, 제 스스로 "용인될 수 없는 짓"을 저질러놓고서 불법도청만 탓하며 손가락질하는 건 또 무슨 경운가.

"안기부 도청 사건으로 인해 국민의 가슴에 상처를 남긴 것 같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는 홍석현 주미대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도 잘못을 범한 죄인은 없다. 있는 것은 애오라지 "국민의 가슴에 상처를 남긴 것 같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자애로운 '계몽군주' 뿐. 하긴 그가 사과하고 반성할 게 뭐가 있겠는가?

중앙 사설에 의하면, 그는 "말이 '보광 탈세' 사건이지 사실은 선거에서 상대 진영을 도왔다는 괘씸죄"를 뒤집어쓰고 "그로 인해 감옥까지" 가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은 정치적 희생양이요, 따라서 "일사부재리 원칙이 있듯이 대가는 이미 치렀다고 보아줄 수도 있"는 불쌍한 인물일 뿐인 것을....

기왕 '사과'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대한민국에서 사과를 가장 잘 하기로 소문난 신문지가 하나 있다. 바로 조선일보다. 조선일보가 사과를 얼마나 화끈.후끈.섹시하게 잘 하는지 아는가?

지난 99년 언론장악문건이 화제가 됐을 때다. 조선일보는 평화방송 이도준 기자가 정형근 의원에게 문건을 전달하기 전 이 총재를 찾았다는 기사를 '확인하지도 않고' 지면에 올린 것이 잘못됐다며 이례적으로 사과문을 1면 상단에 박스로 처리해 올렸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감상해 보시라.

▲ 99년 11월 4일자 조선일보 상단에 자리한 이회창 총재에 대한 '사과문' 

"조선일보는 서울 일부 지역에 배달된 3일자 1면 “문건 이회창 총재와 먼저 상의” 제하의 기사에서, 구속된 평화방송 이도준 기자가 이종찬 국민회의 부총재 사무실에서 빼온 ‘언론장악’ 문건을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에게 전달하기 앞서 이회창 총재를 찾아가 먼저 얘기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작상 실수로 출고됨으로써 이 총재에게 본의 아닌 누를 끼치게 됐습니다. 이 총재와 독자 여러분께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누구처럼 고의도 아니고 단지 '제작상 실수로 출고'된 기사가 실린 신문지가, 그것도 전국도 아니고 단지 '서울 일부 지역'에 배달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조선일보는 1면 상단에 사과문을 싣고 "이 총재에게 본의 아닌 누를 끼치게 됐습니다"고 정중 & 장중 & 엄중하게 사과씩이나 했다. 이 얼마나 흐뭇한 풍경인가.

사과하려면 이쯤은 해 줘야 "아, 저 놈이 사과씩이나 하는구나" 하고 여기는 법이다. '일류신문'을 꿈꾸는 중앙일보와 '초일류기업'을 꿈꾸는 삼성은 이걸 보고 느끼는 바가 없는가?(물론 조선일보가 아무에게나 이런 식의 사과를 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회창 정도는 돼야 이런 대접을 받는다. 조선일보에게 찍히면 속된 말로 국물도 없다. 노무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각설하고, 사과의 맛은 진심에 있다. 진심이 결여된 사과는 아니함만 못하다. 이점에서 제 잘못엔 눈 감고 다른 이의 잘못만 울궈먹으면서 그를 사과라 강변하는 중앙과 삼성, 그리고 홍씨의 작태는 차라리 관객모독 아니 국민모독이다. 이들의 평소 말버릇처럼 국민을 높이 보면 이런 짓 절대 못 한다.

이들에 비하면 한나라당사에 사과 한 박스를 보내 국민 모독 대신 국회의원 모독을 선택한 김대업의 퍼포먼스는 얼마나 참신하고 발랄.통쾌한가.

그나저나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런 사과 받아먹고도 속이 괜찮으십니까? (2005.08.02)



- 어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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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오늘>에 기고한 글입니다.
by 어른이 | 2005/08/02 10:29 | 문한별 칼럼(2005)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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