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8:21~35]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사람 사는 세상은 갈등의 연속이다. 생김새도 다르고 속생각도 다른 사람들끼리 모여 사는 세상이라 오해와 갈등과 분규가 끊이질 않는다. 부모 자식 간에도 다툼이 있고, 세상에서 제일 가깝다는 부부 간에도 갈등과 다툼이 있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것이 "용서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다. 용서가 없으면 이 땅은 지옥으로 화할 것이다. 반대로 용서가 있으면 천국으로 화할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이 용서에 있음을 누구나 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용서가 얼마나 필요한가를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럼에도 정작 우리 주변엔 용서할 줄 아는 이가 드물다. 아니 정직하게 말해서 거의 없다. 누구나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말하지 남을 용서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이는 혹 우리가 용서에 대해서 잘못 접근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용서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두 가지가 있다.
- 첫째)용서를 양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 - 이것은 베드로의 시각이다.
- 둘째)용서를 질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 - 이것은 주님의 시각이다.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 (1)베드로는 용서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는가? (vv.21~22)
- (2)주님은 용서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는가? (vv.23~35)

1. 베드로의 시각 - 베드로의 물음을 통해, 우리는 베드로가 용서의 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형제가 죄를 범할 때 몇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 7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은 교회에서 형제가 죄를 범했을 경우, 문제해결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쳤다. 이때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 베드로의 별명이 '나서기'다 - 동료 교인을 문책하는 문제와 연관해서, 예수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할 때 얼마나 자주 용서해 줘야 합니까?" 하고 묻는데서 본문은 시작된다.

여기서 잠깐! 베드로는 왜 이것을 물어야 했을까? 왜 하필이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베드로가 이런 물음을 던져야 했을까? 우리가 성경을 눈으로만 읽지 않고 마음으로 읽으면 인쇄된 것보다 더 많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행간을 읽는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베드로는 성질이 매우 급한 사람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한 성질하는 사람이다. 참을성도 없다. 갈릴리의 어부로서 거칠 것 없이 살아 온 사람이다. 화가 나고 속이 끓으면 한바탕 퍼부어야 시원한 사람이다. 그런 베드로가 죄를 범한 헝제를 끈기있게 권고하고 포용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답답했을까? 어쩌면 자기 기분대로 행동하기도 힘들어지고 화가 나도 마음대로 표현하기도 힘들어지겠다는 압박감 혹은 두려움마저 들지는 아니했을까? 그래서 도대체 참아야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참아야 하며, 용서해 주어야 한다면 어느 정도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 라는 '관용과 용서의 한계'에 대해 알고자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아닐까? 왜냐면 그것이 차라리 편하니까. 이건 참 재밌는 발상이다.

만약 우리에게 그런 한계선이 주어졌다고 치자. 그러면 힘들어도 참을 수 있다. 그 한계선까지 아둥바둥하며 힘을 내서 참을 수 있다. 만약 용서의 한계가 3번까지라면 아무리 성질나도 이를 갈면서라도 3번까지는 참을 수 있다. 이런 싯구도 있지 않느냐? -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이은상) 숫자가 달라도 마찬가지다. 용서의 한계가 5번까지면 상대방이 아무리 미워도 5번까지는 참고 용서할 수 있다. 한번, 두번, 세번.... 이렇게 수를 세어가면서. 그러다가 5번이 넘으면 그때는 마음대로, 아무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화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때는 상대방에게 마음껏 퍼부어도 아무 것도 꺼릴 것이 없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다. 이제까지 5번이나 참고 또 참았으니까....

이것이 베드로의 간단한 물음 속에 담긴 깊은 속 뜻이다. 다시 말하면 바로 이 한계, 즉 용서의 한계, 이웃 사랑의 한계를 설정해 달라는 말이다. 그러면 힘들어도 거기까지는 참을 수 있고, 공인된 기준에 따라 이웃을 정당하게 대할 수 있겠다는 말이다.

이것이 베드로만의 생각일까? 우리에게는 이러한 욕구가 없을까? 우리가 싸울 때마다 어떤 말들을 주고 받는가 생각해 보라:

曰 - "이 짓도 한, 두 번이래야지? 너! 전에도 잘못했다고 했어 안했어?
그러고도 또 그래? 내가 미쳐..."
또, - "나는 할 만큼 다 했다. 그러니 나에게 더 요구하지 마.
더 이상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나도 인간이다.
나도 어쩔 수 없다. 해도 해도 안되는 것을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베드로는 이 한계 - 해도 해도 안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 를 설정해 달라고 예수님께 조른다. 그러나 여기서 머물지 않고 그 자신이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려고까지 한다: "7번까지 용서해 줄까요?"

그는 용서의 한계를 7번까지 확대해서 제시한다. 나는 여기서 일부러 '확대'라는 말을 썼다. 왜냐? - 당시 유대인 랍비들은 3번까지는 사람들을 용서하되, 4번째부터서는 절대 용서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 랍비 조세 벤 하니나 - "자기 이웃에게 용서를 구할 때는 세 번을 넘기면 안된다".

우리 나라 말에도 '삼 세판'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좋은 말도 3번 이상을 들으면 싫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대개 3번까지는 잘 참고, 용서도 잘 한다. 그러나 4번째부터서는 태도가 달라진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한계다. 그런데 베드로는 여기에 무려 4번을 더해서 7번까지 용서의 기회를 확대시켰다. 이것은 당시의 관습으로 볼 때, 엄청난 용기였고, 파격적인 모험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 평가에 인색할 필요는 없다. 말하자면 베드로는 7이라는 숫자를 제시함으로써 사람이 할 수 있는 인내심의 최대치를 제시한 셈이었다.

"형제가 죄를 범할 때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7번 용서하면 될까요?" 하고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했을 때, 어쩌면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기대했을런지도 모른다. 만약 예수님이 이런 식으로 대답해 주었더라면 베드로의 어깨가 한 없이 으쓱했을 것이다:"베드로야, 그건 너무 파격적인 것 아니냐? 네가 그렇게 관대하게 나오면 죄를 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너무 쉽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일곱 번은 너무 많은 것 같다. 베드로야! 너무 열광적인 신자는 되지 말아라".

그러나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대답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일곱번 뿐만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무슨 말인가? 7번은 너무 적으니 적어도 7*70=490, 즉 490번까지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인즉 용서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으니 끝 없이 용서하라는 말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대답으로 미루어 보건대, 베드로의 물음은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 '베드로의 잘못'이 뭔가? - '그것은 베드로가 용서를 철저하게 양적인 차원에서 파악했다는 것이다'.

용서를 양적인 차원에서 바라보게 되면, 용서는 그 즉시 '의지의 문제'로 변형되고, 그 때부터 용서는 우리가 죽을 힘을 다해서 감당해야만 하는 인내력의 싸움으로 변질된다. 자연히 반복되는 용서와 중단 없는 인내 때문에 우리는 피로하게 되고 우리의 쥐꼬리같은 의지력은 고갈되고 만다. 너무나 당연한 귀결 아닌가? 그러니 누가 이것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양적인 차원에서 용서의 문제를 바라보는 한, 누구라도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관용과 용서의 한계를 정하는 일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베드로가 빠졌던 실수가 정확히 이것이었다. 그는 용서의 문제를 철저하게 양적인 차원에서, 의지와 인내력을 필요로 하는 도덕적인 문제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아니다. 예수님은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용서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음을, 다시 말해서 주님이 바라시는 용서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며 인간의 의지를 소모시키는 도덕적인 문제도 아님을 가르치신다. 그러면 이제 시선을 바꿔 주님의 시각에서 용서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2. 주님의 시각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용서의 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시는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잘못을 시정하시고자 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비유의 주인공은 어떤 종이다. 이 종은 그의 주변 사람과 빚으로 맺어져 있다. 위로 임금님에게 그는 채무자의 관계에 있다. 반면에 횡적으로 그의 동료에게는 채권자의 관계에 있다. 그가 채무자로서 임금에게 갚아야 할 돈은 무려 일만 달란트나 된다. 반대로 그가 채권자로서 동료에게 받아야 할 돈은 벡 데나리온에 지나지 않는다. 이 비유의 포인트가 바로 이러한 과장된 돈의 차이에 있다.

일 달란트는 약 6,000 데나리온이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그러니까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약 20년 품삯이다. 그러면 일만 달란트는 얼마 동안의 품삯에 해당하는가? 놀라지 마시라. 약 20만년 어치다.

이것을 오늘날의 화폐단위로 계산하면 이해하기 훨씬 쉽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4만원으로 계산하면, 일만 달란트는 약 2조 4천억원, 백 데나리온은 400만원이 된다. 그러니까 '일만 달란트 vs 백 데나리온의 차이'는 2조 4천억원 vs 4백만원의 차이다. 비교가 되는가?

당시에 로마가 사마리아에서 거둔 세금이 600달란트, 갈릴리와 베뢰아에서 거둔 세금이 200달란트, 이렇게 팔레스틴 전역에서 세금으로 짜낸 돈이 800달란트였으니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 돈인가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비유의 종이 임금에게 빚진 돈이 일만 달란트다. 이것은 아예 상환 불가능한 액수다. 당시 노예 한 명의 최고가가 약 2,000데나리온이었으니까, 자신의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이다. 이 빚은 너무 커서 살아 생전에 갚을 길이 없고 오직 죽음으로써만 해방될 수 있는 그런 정도였다.

그러나 임금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 빚을 전액 탐감시켜 주었다. 이 종의 기쁨이 어떠했겠는가? 아마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 것이다, 굳이 견주어 말하자면, 죽었다가 살아난 기분이요, 지옥 갔다 천국 온 그런 기분이라나 할까. 그는 임금의 은혜를 입고 새롭게 태어난 듯한 감격을 맛보았다. 이제까지 그를 짓누르고 있던 부채가 하루 아침에 없어지고, 마음의 부담도 깨끗이 해소되었다. 모든 걱정이 일시에 사라졌다. 비유가 여기서 끝나면 얼마나 좋으랴.

그런데 그가 은혜를 입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사건이 꼬이기 시작한다. 그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의 돈을 꾸인 동료 한 명을 만난 것이다. 그는 채권자의 당연한 권리로서 동료에게 빚을 갚으라고 다그치다가 마침내 감옥에 쳐넣고 만다. 우리가 이 사건을 아무런 배경 없이 단지 사회적 법률적 견자에서만 보면, 이 종이 잘못한 것은 없다. 빚은 갚아야 하니까. 빚을 못 갚으면 그만큼 벌을 받아야 하니까.

그러나 이 종이 잊어버린 사실이 있다. 그것이 뭐냐? - 자기가 임금으로부터 엄청난 금액을 탕감받았다는 사실, 아무런 조건 없이 죽었다 깨도 갚을 수 없는 빚을 깨끗이 면제받았다는 사실. - 그래서 이제 그는 그가 임금에게 받은 이 자비를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자비로 반응하고 전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방금 전에 그가 경험했던 이 사실을 망각했다. 그는 임금으로부터 상상할 수 없는 자비를 맛보았으면서도 그의 동료에게는 일체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는 임금에게 큰 은혜를 입었으나 그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도 알려졌다. 임금은 그의 무정한 조치에 대노했고, 방금 전에 자신이 취했던 모든 은전을 취소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종을 붙들어서 그가 동료에게 한 것처럼 감옥으로 보내고 말았다. 이것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이것은 '해피엔드'가 아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은 비극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비유의 깊은 의미가 있다.

임금은 후안무치한 종의 행동에 크게 분노해서 자신이 이전에 취했던 자비를 모두 취소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까? 나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실 때, 하나님은 실은 우리에게 하나의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이다. 이 기회란 집행유예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그리고 그 아들의 피로써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그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약하셨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하나의 계약서에 적어서 우리에게 전해 주셨다. 이 계악서가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책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약을 부여한 이상, 우리는 그것을 인준해야 한다. 그래야 효력이 생긴다. 어떻게 인준하느냐? -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을 받아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행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계약의 조항을 위반한 것이 되고, 결과적으로 그 계약은 무효화되고 마는 것이다.

혹시 '행운의 편지'를 아는가? 옛날에 이 행운의 편지라는 것이 한창 유행했다. 어디서, 누가 보낸 것인지도 모르지만, 거기에 행운이 깃든다는 말이 적혀 있다. 그런데 실은 나는 이 편지를 받고나면 더 불안했다. 왜냐? 거기에 이런 단서가 적혀 있었거든. "이 편지를 받고나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지 않으면 행운 대신 오히려 불행이 온다."

하나님의 용서는 말하자면, 이 행운의 편지와 같다. 그라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용서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하고 나타내 보이면, 이로써 우리 양심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의 효력이 확증되고 생생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지 않으면 이 성경은 오히려 하나님의 분노를 담은 기소장이 되어 우리를 공격하고 우리 마음 속에서는 어떠한 평안도 깃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용서는 이처럼 물과 같아서 위로부터 자연스레 흘러 내리는 것이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보이신 사랑의 물줄기를 따라 다른 사람에게도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고자 할 진대,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인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죄인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사죄의 은총을 입었던가를 되새김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행하신 사실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는 도덕의 차원에서 의무감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신앙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 때문에 용서하는 것이다. 이것이 용서에 대한 주님의 시각이다.

참된 용서는 우리의 힘, 우리의 의지, 우리의 자비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자비로써 하는 것이다. 용서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용서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인들이라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행동을 모방하고 반복함으로써 이웃에게 증거하는 행위다.

이런 의미에서 용서는 릴레이 경주의 바톤과도 같은 것이다. 경주에서 이기려면 이것을 전달해야 한다. 이것이 경기의 규칙이다. 바톤이 전달돼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용서 또한 이웃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비유 속에 나오는 미련한 종은 이 기본적인 규칙을 어김으로써 스스로 파멸을 초래하고 말았다.

말씀을 맺는다.

용서에 대한 두 가지 시각, 두 가지 접근이 있다.

베드로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용서는 양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힘을 소진시키는 의지의 문제, 도덕의 문제로 전락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와 관용의 한계에 대해서 논해야 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볼 때, 용서는 더 이상 괴로운 노력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가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까지 확대.적용시킬 것을 기대하신다.

다시 말하지만, 용서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시선의 문제다. 우리는 용서하기 위해서 굉장한 의지력을 가질 필요가 없고, 다만 눈을 들어 우리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된다. 그러면 새로운 성령의 욕구(의지)가 작동해서 우리로 하여금 진심으로 이웃의 허물을 용서하게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먼저 용서받은 '증인'으로서,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반응하고 전달하고 증거해야 할 책무가 있음을 명심하라. 이 책무를 잘 감당하면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이 이 땅에서도 넘치려니와 이 책무를 소홀히 하고 무시하면 '용서하지 않은 종의 비극'과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인즉....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마 6:12)



- 어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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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이 | 2007/04/22 09:39 | 교회개혁을 위한 묵상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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