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치문외한의 넋두리
나는 정치문외한입니다. 정치(正治)가 무엇인지는 조금 알아도 정치(政治)는 잘 모릅니다. 정치적 수사를 즐겨 사용하고 정치공학을 주업으로 삼는 정치인은 더더욱 모릅니다. 우주인들보다도 더 기괴하다는 저들의 생리를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내가 아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정치가 잘 되야 국민들이 살기 편하다는 것, 그렇기 위해서는 설혹 정치판이 역겹고 혐오스럽더라도 정치에 무관심해서는 안된다는 것, 나 혼자 좋자고 발을 빼면 내 자식들은 더 큰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등등입니다.

기분 좋은 날, TV에서 정치 관련 뉴스가 나오면 행여 그 재수없는 면상들을 볼까 싶어 서둘러 리모콘을 찾으면서도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서라도 은근슬쩍 그 속사정을 둘러보는 것도 아마 이러한 심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때에야 이런 일이 없어질런지....

내가 알기로 정치인들은 대개 남보다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선 가방끈부터가 길고 짱짱합니다. 명문대학 출신이 태반이요, 여차하면 외국물 먹은 박사들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걸 한번 들어 보세요. 얼마나 조리있게 말을 잘 하는지 거짓말도 그들이 하면 진짜처럼 들립니다.

그들은 또한 신분과 지위가 매우 높은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잘난 사람들이지요. 정치인들의 프로필을 보면 그들이 역임했다는 무슨 무슨 '장'(長) 자리만도 수십가지입니다. 고작 서너 줄 쓰고나면 더 덧붙일 것도 없는 나는 그 앞에서 기가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알 수 없는 건, 이렇듯 많이 배우고 똑똑한 양반들이 어쩌면 하는 짓마다 그렇게 우스운 짓거리들만 골라서 하느냐 이겁니다. 너무 많이 배우고 너무 똑똑해서 주화입마를 입어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가방끈 짧은 무지렁이가 보기에도 '이건 아니올시다' 하는 게 너무 많더라 이겁니다.

요즘 2002 대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의 짝짓기 열풍이 한창입니다. 최근 정몽준 씨가 월드컵 성공에 편승해 단숨에 여론조사 상위권에 랭크되면서 이회창-노무현-정몽준을 둘러싼 정치권의 이합집산 내지는 합종연횡이 한층 복잡하게 전개되는 것 같더군요.

어차피 정치라는 게 숫자놀음이고 따라서 여론조사 결과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는 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정치인 이전에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염치와 체통이 있는 법. 오로지 목전의 승리만을 위해 발버둥친다면 금수나 다를 바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민주당에서 '친노'다 '반노'다 하면서 시끄러운 걸로 알고 있습니다. 듣자 하니, 반노 진영에선 노무현으로는 이길 수 없으니 말을 바꿔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하며 세를 규합하고 있다지요? 세상에나 네상에나! 그럴 바에는 여론조사만 하지, 뭣하러 비싼 돈 들여 국민경선을 했답니까.

여론조사란 본래 돌고 도는 것입니다. 연예인들의 인기판도만큼이나 허황되고 불확실한 것이 현금의 여론조사입니다. 어제 인기가 있다가도 오늘 떨어질 수도 있고, 오늘 저조하다가도 내일 급반등할 수도 있는 것이 여론조사입니다. 특히 금년처럼 '바람'이 심하게 부는 해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년초에 민주당 국민경선이 실시되면서 덩달아 '노풍'이 거세게 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땐 정말 대단했습니다. 지역차별, 세대차별의 벽을 넘어 광주에서 부산까지 그리고 20대에서 50대까지 고루 불면서 최고 60% 대의 상승곡선을 기록하기까지 했으니까요.

당시 한나라당은 "배가 흔들리면 쓸데없는 쥐새끼들이 왔다갔다 한다"(하순봉 부총재의 말)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극심한 위기감에 떨어야 했습니다. 김덕룡, 홍사덕, 이부영 의원을 비롯해서 몇몇이 탈당하네 마네 해서 이회창 후보측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5~6월에 접어들어 DJ 두 아들 문제가 전면에 부각되면서 '노풍'이 점점 퇴색되더니 마침내 이회창 후보에게 추월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노무현이 앞섰을 때 가만 숨죽이며 눈치만 보고 있던 민주당 내 반노파들이 기지개를 켜고 준동을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의 일이지요.

8~9월에는 월드컵 성공의 여파를 타고 이른바 '정풍'이 등장합니다. '정풍'은 등장하자마자 각종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던 이회창 후보를 밀어내고 지지율 1위를 기록하면서 대선구도에서 무시못할 한 축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에서 보다시피, 금년은 바람이 모든 것을 좌우할 정도로 변화에 대한 욕구가 거셉니다. 노무현이 선두에 나선 것은 정치사상 첫 실험이라는 국민경선붐을 타고 그의 참신함이 크게 어필했기 때문입니다. 이회창의 부각은 DJ 정권의 비리에 대한 반사이익 때문입니다. 정몽준의 선두진입은 자식의 병역비리에 연루된 이회창에 대한 불신과 상대적으로 때묻지 않은 그의 신선함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확실한 것은 변화된 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이 강고하다는 것, 그것 밖에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 말고 다른 어느 것도 절대불변은 없습니다. 지지율 1위의 정몽준 인기가 하루 아침에 신기루처럼 사그라들 수도 있고, 소망없어 보이던 노무현이 갑자기 부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진대 유능하고 똑똑한 정치인들이라면, 이러한 밑바닥정서를 헤아려 어떻게 하면 국민들의 마음을 얻을까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기는 커녕 여론조사 때마다 달라지는 숫자의 부침에만 정신이 팔려 누구를 밀어내고 누구 뒤에 줄서야 안전한가 하는 더티한 정쟁에만 신경을 쓰고 있으니, 그를 어찌 해야 합니까.

閉門終不接庸流(폐문종부접용류).... 용렬한 놈들 보기 싫어 문을 닫고,
只許靑山入我樓(지허청산입아루).... 다만 청산만을 벗하며 사노라.
樂便吟俄傭便睡(락편음아용편수).... 즐거우면 시 읊고 고하면 잠 자니,
更無餘事到心頭(갱무여사도심두).... 이 밖에 마음 둘 일 무에 있겠나.


고려 공민왕 대의 학자 김구용이 지은 <野莊>이란 시입니다. 그이처럼 문을 걸어 닫고 용렬한 인간들은 멀리 하며 청산만을 불러들여 신선처럼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차마 그리 할 수 없어 오늘도 한쪽 귀는 닫고 한쪽 귀만 열어 정치뉴스를 기웃거리며 어설픈 귀동냥을 계속 하는 정치문외한의 민망한 심정을 똑똑하고 많이 배운 정치인들은 알기나 할까요.(2002.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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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9월, <인터넷한겨레>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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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이 | 2008/03/06 22:15 | 문한별 칼럼(2002)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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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박유진 at 2008/03/07 02:46
2002년 초가을
월드컵의 열기가 가시지않은 그날에도


이러고 계셨군요 ...
Commented by 어른이 at 2008/03/07 12:59
박유진 / 응.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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