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최문순 사장에게 고합니다
[문한별의 언론따지기] X파일 보도 '실패'한 MBC가 소생하는 방법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MBC 기자였습니다. 서울 중부경찰서를 출입하는 사회부 기자였던 그는, 86년 6월 대통령 아들의 경호원들이 서울 논현동 백주대로에서 총질을 하고 전자봉으로 주민을 폭행한 사건이 민통련 발행지에 실린 것을 계기로 민통련 사무실에 들렀다가 거기서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부천 경찰서 문귀동 형사가 취조 과정에서 권인숙(서울대 4년) 씨에게 성고문을 자행했다는.

정의감이 넘치던 그는 즉시 주변을 샅샅이 뒤져 성고문을 당했다는 권씨의 주장이 사실임을 확인하게 되고, 그는 사건의 전말을 서둘러 회사에 보고합니다. 그러나 회사(MBC)는 그를 '쓸데없는 것을 취재하러 다니는 놈'으로 취급했습니다. 발품으로 얻은 그의 보고는 '철저하게 묵살'됐습니다. 당시 보도지침은 '부천서 성폭행 사건, 부천사건 항의시위나 김대중의 부천사건 언급 등 이와 관련된 일체 보도금지'를 지시하고 있었습니다.

권씨는 결국 전두환 정권이 바라던 대로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까지 이용하는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혀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문귀동은 기소유예결정을 받게 됩니다. '성을 도구로 사용'한 문귀동은 풀려나고 '성의 도구가 된' 권인숙씨는 중형을 선고받는 엿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에게 침묵을 강요한 그의 회사는 다른 언론들과 마찬가지로 "권씨가 성을 투쟁의 수단으로 이용했다"고 거짓보도하기까지 했습니다.

자괴감에 시달리던 그는 2년 후 MBC 노보에 글을 올려 "공권력이 저지른 엄청난 죄악 앞에서 22세의 처녀가 그의 모든 것을 던져 일어선 처절한 몸짓을 외면했던 자신에게 굳이 윤동주의 '서시'가 아니더라도 세상 모든 것이 부끄러움으로 다가섭니다"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그로 인해 인신구속이 될 것을 각오하고 말이지요. 참회와 회한의 한숨이 행간마다 짙게 배어나오는 이 글 말미에서 그는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저는 기자가 아닌 것은 물론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최문순 사장.

"기자는 물론 인간도 아니었다"고 울부짖은 이 남자가 누군지 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시대의 장벽에 막혀 진실 보도와 외압 사이에서 고뇌하던 젊은 최문순 기자 말입니다. 벌써 17년 전의 일이군요. 그새 참 많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군부독재가 종식되고 민주화가 꽃피어났으며, 당신 또한 일개 기자에서 MBC 사장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까요. 프레스센터 18층에서 당신을 만난 게 엊그제 같은데....

각설하고, 내가 왜 지금 와서 새삼스레 17년 전의 일을 꺼내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작금의 X파일과 관련하여 당신의 후배기자에게서 이전에 당신이 가졌던 것과 똑같은 고뇌를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그는 바로 이상호 기자입니다. 그는 무늬만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추악한 실상을 폭로한 전대미문의 특종을 입수하고도 국민에 알리지 못했습니다. 왜? 어처구니 없게도 최문순 당신이 사장으로 있는 MBC가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이 MBC 사장이 되고나서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느 정도 바뀌기야 했겠지만 그러나 개혁을 지향하는 그 근본만큼은 전혀 바뀌었으리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거리에서는 불멸의 투사지만 개인적인 만남의 자리에서는 남의 말을 늘 경청하고 웃음으로 답례하는 당신의 선굵은 겸양을 잘 아는 까닭입니다. 나는 지금도 "네, 네" 하며 허리 굽혀 손님을 맞는 당신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후배 이상호 기자 생각도 아마 나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로 '이상호의 고발뉴스'라는 자신의 사이트에 '사회부의 열혈 최문순 기자'를 반추하며 "역사는 어쩌면 끝없이 반복되는 법인가 봅니다. 오늘은 '말 못하는' 제 마음을 옛글 속에 녹여봤습니다"고 술회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더 괴로운 것이겠지요. 차라리 최 사장이 "양심고백을 비껴간 시대의 공범자들"처럼 "저널리스트로의 안온한 일상을 유지한 사람"이었다면 그의 마음도 외려 편했을 것을.

일전에 김상훈 MBC 노조위원장을 만났을 때도 나는 그에게서 이 기자와 같은 고민을 발견했습니다. 그 역시 진실보도의 당위와 '개혁운동가 최문순' 사이에서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습니다. X파일을 묵혀버린 회사를 두둔하고 싶어도 두둔할 수 없고. 그렇다고 내놓고 비난할 수도 없는.... 그는 당신이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너무 곧은 사람이라서 더 말하기가 조심스럽다고 했습니다. 당신 때문에 괴로워 하는 이들이 어찌 이들 뿐이겠습니까?

최문순 사장. 실은 나도 당신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 중의 한 명이지만, 당신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오늘은 한마디 해야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지난 번 X파일 보도와 관련하여 MBC는 크나큰 실책을 범했습니다. 기자가 목숨을 걸고 취재한 특종을 통신비밀보호법이다 법원 판결 존중이다 해서 발뺌하다가 타 언론사가 치고 나가자 '앗 뜨거라' 하며 뒤따라가는 비겁한 모습을 연출한 것은 변명의 여지 없이 잘못된 것입니다.

MBC의 이런 행태에 대해 "보도할 이유을 찾기보다 보도 못할 이유만 찾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해일처럼 쏟아졌습니다. 그런데도 MBC는 각성하기는커녕 검찰에 자진해서 모든 자료를 제공하는 이해못할 모습까지 연출했습니다. 이것이 '최문순호'의 MBC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MBC가 스스로 월척을 낚고도 알맹이는 타 언론사에 다 빼앗기고 국물만 마시는 한심한 처지로 전락한 전략상의 실수를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다른 것입니다.

최문순 사장.

X파일의 본질이 뭐라고 보십니까? 사람들은 흔히 '정-경-언-검'의 4각 유착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직하지 못한 답변입니다. 여기에는 주어가 빠져 있습니다. 바로 삼성이란 거대기업 말입니다. 언론사주를 '따까리' 삼아 대선주자에게 돈을 건네라고 시킨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건희 삼성 회장입니다. 국가공무원인 검찰을 떡값으로 관리하며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꼬드긴 장본인이 누구입니까? 1%도 안 되는 지분으로 삼성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이건희 회장입니다.

이처럼 X파일이 폭로하고 있는 것은 언론과 사법 및 대한민국의 모든 분야를 실질적으로 장악한 경제권력이 거대자본을 이용, 민의와는 상관없이 제 입맛에 맞는 정치권력까지 세우려 한 내란음모입니다. 비록 미수에 그치고 말았지만 그러나 그 사악함은 총칼로 국회를 짓밟고 그도 모자라 국민의 선거권을 박탈, 체육관에서 자신의 꼭둑각시들을 동원해 대통령을 선출하게 한 전두환의 폭거와 다를 바 하나 없습니다. 탱크 대신 돈을 무기로 활용했다는 것이 다를 뿐.

국민이 직접·비밀 투표를 통해 나라를 경영할 대통령을 뽑는다는 민주주의의 요체가 여기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국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국민이 나라주인임을 명문화하고 구체화한 헌법이 무참히 강간당하고 유린됐습니다. 대한민국은 능력있는 몇몇 사람이 언제든지 제 맘대로 리모트 콘트롤할 수 있는 매트릭스가 되고 말았습니다. X파일의 무서움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럴진대 최문순 당신은 MBC 사장으로서 이에 맞서 감연히 싸웠어야 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대한민국을 위해, 그리고 언론자유와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분연히 떨치고 나섰어야 했습니다. 자본의 힘으로 이 나라를 복속시키려 한 거대기업의 쿠데타에 맞서 분기탱천 투쟁했어야 했습니다. 17년 전 당신이 흘린 좌절의 눈물을 똑같이 흘리고 있는 후배기자를 생각해서라도 앞장서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최문순 사장.

당신은 어떻게 했습니까? 실망스럽게도 맞서지 않았습니다. 나라의 존망을 좌우할 엄청난 내용이 담긴 X파일을 확보하고도 그를 공개하기보다 법원을 이용해 입막음을 시도한 삼성의 으름짱에 응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알권리를 그보다 하위법인 통비법을 빌미삼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국민 대다수가 X파일 내용을 공개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MBC는 '모르쇠'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민노당 노회찬 의원이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의혹이 있는 검사들 명단을 공개하고, 실명이 거론된 차관이 옷을 벗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와중에 월간조선은 X파일 전문을 보도해서 충격을 가중시켰습니다. 당신과 MBC가 침묵하고 있는 새 일어난 일들이 이러합니다. MBC는 X파일 초기대응에서 실패한 것처럼, 후속대응에서도 실패했습니다. 이 점에서 MBC는 사회의 지탄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아직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이전의 실수를 일거에 만회할 절체절명의 반전, 그건 바로 최문순 사장 당신이 9시 <뉴스데스크>에 나와 이전의 미온적인 자세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 · 반성하고, 이제껏 알리지 못한 삼성 X파일 불법대선자금 전내용을 국민 앞에 전격 공개하는 것입니다. 월간조선이 X파일 내용을 한발 앞서 기사화했다지만 그러나 당신이 나서서 테이프 내용을 공개한다면 그땐 문제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테이프 내용을 활자화한 월간조선의 행위는 기껏 통비법에 저촉될 뿐이나, 만약 당신이 법원의 결정에 맞서 테이프 내용을 음성으로 또렷히 공개한다면, 당신의 행위는 그때부터 언론자유를 위한 거대한 투쟁으로 승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신은 실정법 위반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선 법의 심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당신과 MBC가 사는 길입니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은 이순신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맞부딪히고 있는 문제는 MBC가 사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헌법이 보장한 언론자유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만약 이번에 이건희 일가의 쿠데타를 분쇄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영영 그들의 놀이개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잖아도 이 땅은 이미 '삼성천하' 아닙니까? 이것을 용인하며 묵과하고 방관하시겠습니까?

거대한 불법 탈법 위법을 취재하고도 주변의 강압에 눌려 보도하지 못하는 피눈물은 17년 전 당신의 경험으로 끝나야 합니다. 당신의 사랑스런 후배인 이상호 기자의 입에서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저는 기자가 아닌 것은 물론 인간이 아니었습니다"는 절규가 반복되고 대물림되어서는 안됩니다. 최문순 사장.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입을 여십시오. 지금은 들을 때가 아니라 말할 때입니다.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얻으십시오. 더 늦기 전에. (2005.8.22)



- 어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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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디어오늘>과 <데일리서프>에 기고한 글입니다.
by 어른이 | 2005/08/22 21:53 | 문한별 칼럼(2005)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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