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성령체험을 중시하고 은사를 좇는 사람들은 혹은 환상을 보거나 혹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한다. 기도원에서는 등골이 오싹한 전율이나 신비한 체험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이 과연 하나님을 아는 것일까? 아니 도대체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근거로 해서 아무에게나 감히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고찰.1] 마 7:21~23 본문의 주된 모티브는 '주님을 아는 문제'다. v.23에 있는 주님의 대답을 주의해 보라 :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앞에 나온 여러 부류의 사람, 곧 "주여! 주여!" 부르짖으며,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 쫓고, 권능을 행한 사람들의 자랑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나는 주님을 이렇게 잘 안다"는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주님을 잘 안다"는 것은 굉장한 특권일 터다. 지금도 잊을 만 하면 '청와대 사기사건'이 도지지 않는가? 대통령과 친하다, 청와대 고위 인사와 잘 안다고 하면 뭐든지 통용이 되는 세샹이니까 아직도 이런 범죄들이 없어지지 않는거다. 그런데 지금 이들이 똑같이 자신들을 주님과 가장 가깝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능이나 이적들을 그 증거로 내세운다. '주의 이름'으로 한 게 아니라면 어찌 이런 이적과 능력들이 가능하겠느냐고 떠벌이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행위가 '주의 이름'으로 행해졌음을 내세운다. 마치 자기들이 주의 대리인이라도 되는 냥....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에 '주의 이름'이라는 브랜드를 붙여서 내놓을 만큼 주님과 직통하는 사이라는 것을 자랑한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주님께서 무어라 답변하셨던가? ---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눈물나리만큼 처절한 희극이다. 이보다 더 비극적인 코미디도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을 가장 잘 안다고 경쟁적으로 말했는데,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를 모른다,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어딴 고위층을 찾아 가서 "나는 당신을 잘 압니다"고 말하는데, 그쪽에서 뻔히 쳐다 보면서 "나는 당신을 모르겠는데" 하면 그 얼마나 쑥스럽고 부끄러울 일이냐? 본문의 형편이 그렇다. 우리의 주관적 체험, 개인적 사건을 들어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본문에 비추어 명백하다. 심지어 주님은 이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까지 말씀하신다. 엄청난 반전이다. 이들은 자칭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부르신다. 극과 극 아닌가? 여기 분명한 사실이 있다 - 우리의 행동이 사람의 눈에는 어떠하든지 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지식에서 유리된 때에는 그것은 불법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불법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벗어난 우리의 열심조차도 불법이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의 지식에 의해 규정되고 제약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불법을 행할 수 없다. 역으로 불법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일 수가 없다. 이 둘은 결코 양립하거나 어울릴 수 없는 사이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는 이 둘의 희극적 결합이 자주 눈에 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종교적 확신은 강한 반면에, 그 삶에서 '하나님을 아는 흔적'이나 '향기' '열매'를 발견할 수 없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이냐? 스스로 하나님을 소유한 것처럼 '성령이 충만'하고 '경건한 사람'은 교회마다 넘쳐나는데, 어이된 일인지 이들은 한결같이 무섭고 살벌하고 비인간적이어서 접근하기도 쉽지 않다. 그들 신본주의의 사도들 앞에서 감히 '인간....' 운운했다가는 뼈도 못추린다. 어쩌면 우리는 불법을 행하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을 아노라! 하는 무서운 착각과 환상에 빠져 있지는 아니한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신자에게 이토록이나 무서운 문제다. 명심하시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불법이냐 아니냐'를 결정짓는다. [고찰.2] 렘 9:23~24 본문의 주된 모티브는 '진실로 가치 있는 것, 진실로 자랑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다. 부자는 돈을 자랑한다. 권력가는 권세를 자랑한다. 학자는 지식을 자랑한다. 그러면 크리스챤은 무엇을 자랑할까?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이것 밖에 없는 고로 우리는 이것을 자랑한다. 돈도 사라지고 권력도 유한하며, 지식도 잊혀지되, 오직 하나님의 지식은 영구히 변치 아니하므로 우리는 이것을 자랑한다. 세상 사람은 우리를 가리켜 손가락질하며 가로되 "너는 돈도, 권력도, 지식도 없구나. 불쌍한 놈"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담대히 답한다 : "우리는 그런 것 안 키운다. 가지라고 해도 안 가진다. 나는 그런 것을 배설물 취급하기로 했다. 왜냐면 나에게는 세상이 모르는 보물이 있기 때문이다."(참조. 빌 3:7~9) 세상이 모르는 비밀이 뭔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실체를 깨닫는 것은 우리의 자부심을 크게 만들어 준다. 이 지식이 있으므로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담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에 천만이 넘는 크리스챤이 있는데 이렇게 조용하고 무력한 까닭이 뭔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해 자랑할 것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고로 오히려 한국교회가 돈 앞에, 권력 앞에, 지식 앞에 무릎을 끓는다. 요즘 우리가 눈만 뜨면 목도하는 사실이 이것 아니냐. 하나님을 바로 알면 이런 짓을 못한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 곧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바르게 깨닫는 것은 이토록이나 중요한 것이다. 이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짧은 에피소드를 통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 선지자와 여호야킴 왕의 대결장면이다. [본문] 렘 22:13~19 / 성경을 보고 대답해 보라. 선지자는 무엇 때문에 왕에게 화가 났는가? - 왕이 새로운 궁전을 지었기 때문. 이것이 왜 그렇게 큰 문제가 되는가? 본문을 살펴 보자. 여호야킴은 요시야 왕의 아들이다. 요시야 왕은 애굽과의 전쟁에서 죽고 여호야킴은 애굽왕 바로느고에 의해서 왕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니 애굽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처지다. 백성들은 어찌됐든 상관없이 무거운 세금을 물리고 돈을 긁어서 애굽으로 보냈다.(이상 왕하 23장 참조) 설상가상으로, 백성들은 살림에 쪼들리고 먹고 살기조차 어려운데, 이런 판국에 왕이란 사람은 엄청나게 큰 궁전을 짓고 있었던 것. - 집이 몇 층? : 2층 (다락방) - 재료는 뭐냐? : 백향목(수입산)으로 창틀을 만들고 집을 광대하게 지었다. - 왜 이렇게 사치하게 지었나? : 왕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서다.(v.15). 정통성 없는 정권들이 이런 짓을 잘 한다. 그런데 선지자의 책망은 비단 이 문제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선지자가 지적하는 것은 더 중요한 문제다. 그게 뭐냐? - 건축의 수단 자체가 불의하다는 것이다. - 어떻게 불의하나? : 불의로 집을 세우고, 불공평으로 다락방을 짓는다.(v.13) - 어떤 짓을 했길래? : 이웃을 노예로 부려 먹고, 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왕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민중을 착취하고 학대했다. (v.17)에 왕의 범죄가 열거된다. ---- 탐람,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림, 압박과 강포. ('강포'는 "짓이겨서 부순다"는 말이다. 여호야킴 왕의 노동정책이 그러했다.) 선지자는 여호야킴 왕의 악함을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내기 위해 그를 자기 아비에게 비교한다. 이른 바 '보색대비'라고나 할까. 왕의 아비 요시야 왕은 유다왕들 중에서 보기 드물게 개혁정책을 수행하여 하나님에게 신망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우상을 없애고, 율법을 다시 회복시키고, 정치적으로는 소외된 자들을 잘 보살펴 주었던 것이다. 그런 다음에 선지자의 단호한 말이 따른다. 이것이 본문의 핵심이다. - 가난한 자를 돕고, 궁핍한 자를 신원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나를 아는 것이 아니냐? [마감하는 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내 개인적인 체험을 훨씬 뛰어 넘는 사건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 분이 홀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때만 바르게 알 수 있다. 그 분의 말씀을 들어 보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 호 6:6 - 하나님은 번제나 제사보다도 하나님 아는 것과 인애를 더 바라신다. #. 렘 9:24 - 하나님을 아는 것 = 하나님은 공의와 자비를 이 땅에 행하시는 분임을 깨닫는 것.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코 말의 문제가 아니다. 성경은 관념론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지식은 철저히 '실천과 행동'의 문제다. 특히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더 나아가서 성경은 고립된 개인주의를 결코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골방에서 숨어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이웃을 통해서만 알려지고 만날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을 아는가? - 그렇다면 그 증거를 보이라. : 입으로 말하지 말고 몸으로 증거하라.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을 표출하라. ----------------------------------------- *** (성경 본문을 직접 찾아 일일이 대조하며 확인하세요.) - 어른이 -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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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세계적..by TNS at 08/19 예전 글이군요... 공모.. by 흠... at 08/19 ㅎ by 엄마 at 08/17 이글을 복사해서 단 3군.. by ddd at 08/13 이대통령에게 너무나 안.. by 안영목 at 08/09 진짜 막장이네, 어떻게.. by 에구 at 08/08 ㅁ맛잇어 보이네요 위치.. by 영숙 at 08/06 와 정말 예쁘네요. 블로.. by 아톰 at 08/03 .. by 프리 at 07/24 씨발 엘프새끼들아 니네.. by 프리 at 07/24 가 볼 만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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