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막골’ 여일을 죽인 범인은 누구인가?


내가 사는 평촌에서 남태령을 넘어 사당쪽으로 가다 보면 그 중간에 '웰컴 투 서울'이란 팻말이 보인다.  "서울에 오신 걸 환영한다"는 인삿말이다. 물론 서울로 넘어가 봤자 매연과 소음, 교통체증만 나를 반기지만. 
 
어제 나는 아이들과 함께 동막골에 다녀 왔다. 다녀온 사람들마다 너도 나도 좋다고 떠드는 통에 호기심이 도져 도저히 아니가고 배길 수가 없었다. 사실 진즉부터 다녀오려 했었지만 그러나 찾는 이가 워낙 많아 엄두조차 못내던 터였다. 어제도 인터넷 예매를 통해 저녁 늦게서야 겨우 한 자릴 차지할 수 있었으니 '그놈의 인기'라니....
 
영화관은 역시 만원이었다. 젊은 연인들, 단체로 오신 어르신들, 아이를 안고 온 가족들, 이렇게 세대를 아울러 여러 계층이 극장 안을 가득 매우고 있었다. 이들을 보며 '웰컴 투 동막골'이 대박행진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비결을 새삼 확인했다.
 
내 옆자리에도 나이 지긋한 분들이 앉아 계셨다. 아마 여럿이서 무리지어 오신 것 같았다. 이분들은 영화 초반부터 웃기 시작했다. 아니 이분들 뿐만이 아니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동막골 사람들이 뿜어내는 순박한 언어에 웃음짓지 아니한 사람들이 없었다.
 
'적대(敵對)의 세상'과 '무적(無敵)의 세상'이 충돌해서 빚어지는 아름다운 불협화음이 고조되면서 웃음소리는 한층 더 커졌다. 머리에 꽃을 꽂은 '미친년' 여일(강혜정 분)이 인민군과 국군이 번갈아 총을 들이대도 무서워 아니하고 오히려 눈을 깜빡거리며 "근데 있잖아, 쟈들하고 친구나" 하고 물을 땐 모두가 뒤집어졌다.


이모양 관객들이 동막골에서 맨처음 느낀 것은 웃음이었다. 장난기 가득한 장진 식의 말장난도 한 몫 했다. 예컨대, 부상당한 미군과 동막골 선생이 영어로 대화할 때 'How are you'라고 묻고, 이어 'I'm fine'이란 답이 나오지 않자 "왜 약속대로 안하느냐"고 나무라는 동막골 사람들의 유쾌한 무지 같은 것....
 
웃음 다음에 찾아온 것은 감동이었다. 예기치 않은 수류탄 폭발로 옥수수가 팝콘으로 변하는 환타스틱한 장면 이후 식량창고를 채울 때까지 마을에 머문다는 명분 하에 인민군과 국군이 노동과 놀이, 축제를 통해 조금씩 가까워지고 마침내 동막골을 적의 기지로 오인, 초토화시키려는 미군의 작전에 맞서 이들이 하나가 되는 과정은 관객들의 가슴을 덥히기에 충분했다.
 
영화는 막바지에 이르러 여일이 총상을 입고, 인민군과 국군들 또한 동막골을 지키기 위해 장렬히 산화한다. 전개돼 가는 내용으로만 보자면 비극 그 자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비극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은 동막골이 현실에는 없는 환타지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념으로부터 순진무구한 그들에게는 인민군이나 국군이나 다를 바 하나 없다. 군복을 벗겨 놓으면 모두 같은 민족일 뿐이다. 심지어 '스' 씨 성을 가진 추락한 미군 전투기 조종사도 한복을 입혀 놓으면 영락없는 동네 주민이다. 이렇게 그곳에는 분열이 없다. 대립이 없다. 차별이 없다. 미움이 없다. 거짓이 없다. 정치가 없다. 적이 없다.
 
그래서 동막골은 비현실이다. 묵향 번져가는 수묵의 세계 곧 무릉도원이다. 이쯤되면 초월의 언어가 난무할 법 하건만 그러나 박광현 감독은 신출내기답지 않은 영악함으로 영화 곳곳에 현실을 의식한 안전장치를 숨겨둔다.
 
일을 하던 국군과 인민군이 누가 먼저 공격했냐?는 문제로 다투다가 '리수화'가 북쪽이 먼저 내려왔다고 실토하게 한 것이라든지,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을 묻는 리수화에게 마을 촌장이 "잘 먹이면 돼"라고 답하는 장면 등은 이 영화에 붉은색 돋보기를 들이대는 보수주의자들조차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대목들이다.
 
그럼에도 비현실을 현실로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동막골이 여전히 불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공동경비구역'에서 조심스레 어울려 놀던 남.북한 군인들이 '이념청정구역' 동막골에선 아예 대놓고 친근감을 과시하고, 심지어 동막골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넘어선 우정으로 미군의 폭격에 맞서기까지 하니까.
 
8.15 광복을 기해 남북이 서울에서 만나 민족의 정을 나눈 것도 눈엣가시같은 그들이다. 강정구 교수가 '6.25 전쟁은 통일전쟁'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처단하라고 목에 핏줄을 세우는 그들이다. 방북한 민노당 대표가 방명록에 남긴 몇 줄 문구에 흥분하며 흰자위를 내보이는 그들이다. 더욱, '반전'을 '반미'로만 알아듣는 그들이다. 그런 그들의 눈에 동막골의 파격이 어떻게 보였을까는 물어보나 마나다. '웰컴 투 김일성왕국'(조선일보 진성호 기자)이란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말이다.
 
여일은 그래서 죽어야 했다. 아니 죽여야 했다. 너무나 순수해서 '미친 년'으로 불릴 수 밖에 없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불순을 '제 정신'이라 규정하는 이 땅의 현실을 초라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어차피 순수라든가 순결 따위는 이 땅에서 더는 구경할 수 없는 환타지의 영역 아니던가.
 
그래서다. 그것을 되살리고 가슴에서 불지펴내는 건 철저하게 동막골을 여행한 관객들의 몫이다. 여일의 천진난만한 웃음에 감염되고 누구든 가리지 않고 따스하게 맞이하는 그곳 사람들의 넉넉한 표정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 바로 우리. (2005.9.5)
 
 
 
- 어른이 -
----------------------------------------- ***
#. 데일리 서프미디어오늘에 기고한 글입니다.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by 어른이 | 2007/04/05 23:20 | 문한별 칼럼(2005)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iandyou.egloos.com/tb/122191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언어는 '지금, 여기서' 화육되지 않으면 안된다. 현장의 언어로..
by 어른이 2007 Egloos top100
Calendar
카테고리
문한별 칼럼(2008)
문한별 칼럼(2007)
문한별 칼럼(2006)
문한별 칼럼(2005)
문한별 칼럼(2004)
문한별 칼럼(2003)
문한별 칼럼(2002)
문한별 칼럼(2001)
문한별 칼럼(2000)
교회개혁을 위한 묵상
성경공부(강의) 연재
한별의 시편
한자로 풀이한 성경
살아가는 야그
먹는 즐거움
issue hunting
crazy media
today's cartoon
all that sports
laugh with me
and so on....
김영호의 매운 정치훈수
하재근의 보다 나은 세상
정문순의 여성 플러스 문학
황문성의 감성사진 앨범
김종선의 부동산 비밀과외
최근 등록된 덧글
스파이다...;
by 봉♡ at 10/08
십할 ㅋㅋㅋㅋㅋ 라따..
by thswogns at 09/27
미국하고 깨지면 바로전..
by 어른이 at 09/25
나는 옛날에 축구공 만드..
by 대명그린 at 09/24
기도하고 응답받은데..
by 참어이가없군 at 09/21
엘프 옛날에도 이상한 짓..
by s at 09/20
위엣놈. 엘프 잘못 아니..
by s at 09/20
-__-그게 왜 엘프잘못..
by 엘프잘못이니? at 09/16
푸하하하 재밌게 잘보고..
by _REN at 09/14
이 불쌍한 양반들아~ ..
by 제임스딘 at 09/11
가 볼 만한 곳...


네오이마주
포토로그

바람 불어 좋은 날...
이글루 링크
rss

skin by zodiac47